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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의 植民地 統治實態 1920年 (大正 9)

  • 김학도
  • 조회 : 1094
  • 2017.08.30 오전 07:16

1920年 (大正 9)

3·1 獨立萬歳運動 1周期를 당하여 서울 · 平壤 · 宣川 等地에서 獨立萬歲運動이 다시 일어났다. 상하이 臨時政府는 國內의 鬪士들과 聯隊鬪爭을 實施하고 大韓 獨立軍이 滿洲 鳳梧桐과 靑山里 戰鬪에서(注1) 日本軍을 크게 이겼다. 英親 王 李垠이 마침내 일본의 미야케리본궁 마사코(宮家梨本宮方子)와 婚姻式을 올리고 民族精氣와 民族自存에 큰 傷痕을 남겼다.

새로 赴任한 사이토 마코토(齊藤 實) 總督은 “他人을 支配하려면 哲學과 宗敎와 敎育, 그리고 文化를 앞세우고 精神을 支配해야 한다.”는 施政方針으로 [文化統治政策](注2)을 펼쳤다. 이 政策에는 植民地 民衆의 精神까지 支配하려는 무서운 본질이 담겼다. 사이토 총독은 "皇恩에 感泣하도록 朝鮮人을 洗腦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 政策에 의해『 朝鮮日報 』·『 東亞日報 』·『 時事新聞 』 등이 창간되었다. 그 밖에 月刊 綜合情報紙나 純粹文藝誌 등도 創刊되어 문단에 많은 문예 작가가 등장하고, 春秋戰國時代를 이뤘다. 이 時期에 가장 큰 변화는 口語體 文章의 確立이었다. 廢墟 同人 吳相淳은『 廢墟 』 創刊趣旨에서 “우리 朝鮮은 荒凉한 廢墟의 朝鮮이며, 우리의 時代는 悲痛한 煩惱의 時代이다”라고 말했다.

이 해 설날부터 總督府는 朝鮮 쌀 增産을 計劃했다. 이는 일본 本國에서 쌀이 매우 부족한 것으로 이것을 한국 쌀로 充足 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조선 총독부는 한국에서 생산되는 쌀 950만 가마니 중 700만 가마니를 일본에 도입할 계획을 세우고, 부족한 食料는 滿洲에서 들여오는 옥수수, 콩 등 雜穀으로 充當하도록 했다.

[注1] 鳳梧洞 · 青山里戰闘:1920 年代에 들어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獨立軍部隊가 中國 満州와 소련 領沿海州 一帯를 中心하여 活動했다. 이러한 部隊가 日本의 軍警과 戰闘를 하면서, 軍資金募金·密偵処断·親日派粛清 등의 活動을 展開했다. 事實、獨立軍이 相對的으로 優越한 日本軍과의 戰闘에서 勝利한다는 것은 容易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困難한 状況에서도 壮烈한 勝利를 거둔 戰闘가 바로 鳳梧洞戰闘와 青山里 大捷이다.

[注2] 文化統治政策:日本帝國主義는 韓國을 強制로 併合한 後,強力한 植民地弾壓政策을 採用하였다. 그리하여 소위 [憲兵警察政治]라고 하여 憲兵警察을 全國에 配置하여, 民族運動을 弾壓하고 統制를 強化했다. 그 중에 [3·1獨立運動]이 發生한 以後는, 政策에 問題가 있다는 것을 認識하여 宥和政策을 展開한 것이다. 즉 韓國人의 文化生活과 教育 등을 制限的으로 許容하는 政策을 展開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政策은 모두가 植民地 統治의 한갓 手段일 뿐으로, 저들의 植民地政策의 根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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