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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의 植民地 統治實態 1916年 (大正 5)

  • 김학도
  • 조회 : 1145
  • 2017.08.26 오전 08:28



日帝의 植民地 統治實態 1916年 (大正 5)

初代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가 일본 內閣總理大臣으로 轉任하고, 第2代 朝鮮總督으로서 일본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赴任했다. 그는 [한일병합] 당시 일본군 사령관으로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보좌하면서 악명을 떨친 인물이다.

日本帝國은 景福宮의 慶福宮勤政殿과 光化門(注 1)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조선 총독부 廳舍를 세우려고 起工式을 올렸다. 이는 朝鮮人民으로 하여금 일본제국 통치의 위엄과 함께 일본에 대한 敬畏心을 북돋으고, 무능했던 조선 왕조에 대한 추억과 조선 왕조의 血脈을 끊으려고 하는 등등의 多目的 布石이었다.

總督府는 年初부터 식민지 교육을 위한 방안으로 敎員의 마음가짐을 공포했다. 교원의 마음가짐의 목적은, 忠良한 國民養成과 君臣一體의 國體와 무궁한 皇運을 祝願하는 데에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金 科奉은 한글을 연구하고 한국어를 지키기 위해 [조선말본(조선어법)]을 간행했다. 또 식민지 조선의 수탈을 더 원활히 하기 위해서 전국 도처에 철도와 도로 항만을 건설했다. 경성·부산 사이를 연결하는 京釜線에 일등 침대차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人質로 일본에 머무르고 있는 英親王 李垠의 妃로서 일본의 宮家梨本宮方子(16세, 한국 이름 이방자)(注 2)가 결정됐다는 소식은 조선의 백성을 다시 悲嘆에 빠뜨렸다. 또 일본제국은 우리나라 곳곳에 神社를 짓고, 朝鮮民衆의 皇國臣民化 政策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총독부는 경남 鎭海에 현대식 軍港을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고, 일본 明治(메이지) 民法의 戶主權이 법에서 한층 강화됐다.

[注1] 光化門: 景福宮의 南門인 宮闕의 正門이다. 또 國王의 드나드는 정문이긴 했지만 朝鮮의 王(正)宮인 景福宮의 正門이기 때문에, 다른 궁궐의 정문보다 그 규모와 格式面에서도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 일본제국 시대, 조선 총독부 청사건립 때문에 눈에 띄지 않은 곳에 옮겨졌지만, 光復 후 제자리로 개축됐으며 그 偉容을 자랑한다.

[注2] 李方子: 일본의 宮家梨本宮(미야케 리본궁)의 장녀로, 1918(大正 7년 일본의 학습원 졸업 후 1920년 4월 한일 화합의 초석이 될 것이라고 일본 천황의 명령으로 대한 제국의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과 강제로 政略結婚을 했다. 그 후 일본에서 왕족 대우를 받으며 지냈다.

조국이 광복한 뒤 1963(昭和 38)년에 국적을 취득하고 영친왕 이은과 함께 귀국했다. 그 후 정신박약아를 위한 복지사업, 소아마비아를 위한 시설 건설, 영친왕 기념사업회를 출범시키고 활동했다.

1989년에 영면, 부군 영친왕과 합장, 국민장 무궁화 대훈장이 追敍됐다.저서에는 [흘러가는 대로] [The World is One] [歲月이여 王朝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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