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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렙회

냄새

  • 김학도
  • 조회 : 3990
  • 2017.11.15 오후 05:03

냄새

카와 히로시

nonfiction작가

綠風會 會員

"마늘"냄새

저는 전쟁(제이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아니 끝나고도 한동안 마늘 냄새를 몰랐다.

내가 중학교 삼학년 때 전쟁은 끝났지만, 공부는 별로 안 하고, 책만 읽었다. 항상 굶주리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마음이 주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사도 부모도 의탁하지 않았다. 전후 오년 만에 대학 문학부에 들어갔다. 한국 전쟁이 시작된 해이다.

여기서 다사제제(多士濟濟)한 친구를 만났다. 만주와 조선으로부터 돌아오는 자도 많았다. 어느 날, 본인은 에타지마(江田島)의 사관학교(士官學校)에 있었지만, 가족은 만주에서 돌아온 친구네 집에 묵으며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당시의 일이니까 김치뿐이었지만 그 향기와 맛은 너무 맛있어서 다음날 조금 얻어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버지에게 버림을 당하고 말았다.

"이런 마늘 냄새 나는 것을 가지고 오지 마라!"

좀처럼 혐오(嫌惡)의 감정(感情)을 나타내지 않는 아버지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나는 항거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중일전쟁(中日戰爭) 초기, 중국 전선에 출정했던 아버지는, 단편적으로 당시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냄새는 싫었다" 고 하였다. 나는 "유기사체(遺棄死體) 수백이나 수천이라도 생명을 두개 갖는 것은 없다."(土岐善려)라는 情景과 냄새인가 싶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중국의 거리나 마을에 풍기는 "마늘"냄새에 대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이 차별(差別)의 표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토기아우려의 短歌는 생명의 소중함을 읊은 것이다.

카지이 모토지로(梶井基次郎)에게 "마늘"(大蒜)이라는 작품이 있다. 구제(舊制) 고교 시절 계탁(屆託)을, 유명 서점의 미술서적 위에 방추형(紡錘形)의 색깔 고은 레몬을 두고, 대폭발을 몽상한다는 섬세하면서 간결한 단편 "레몬"으로 알려진 작가이다. "마늘"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주인공이 중학교 고학년 때 신임(新任) 유도사범(柔道師範)에게 "마늘"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동창생으로부터 주목을 끌었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사범(師範)이 카와다(河田)라는 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와다는 "마늘"이라고 끊임없이 놀림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별명을 붙인 주인공도 동급생도 "마늘"은 본 적도 먹어 본 적도 없는 것이다. 그저 지식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편견(偏見)이 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전후(戰後)에 일본에 머무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빈번히 이루어질 때까지는 별로 인연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국에 있어서 마늘은 빼놓을 수 없다. 워낙 천신(天神)의 아들 환웅(桓雄)은 태백산에 사는 곰에게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알을 주고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움막 굴 속에 서 인간이 된 것이, 조선인의 조상이라는 신화가 있을 정도이니 당연한 것이다. 마늘 없는 한국 요리란 있을 수 없다.

저는 학생 시절에 신주쿠의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기 시작한 때부터 마늘 냄새가 싫지 않았다. 정말로 좋아하게 된 것은 조선, 한국에 관심을 갖고 책을 읽고 재일(在日) 한국인 친구도 생기고, 한국에 자주 가게 되면서부터이다. 마늘의 효력이 강한 조선의 김치와 막걸리가 있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어머니의 냄새

내가 철 든 것은, 도쿄시 홍고구(本鄕區) (現文京區) 사카시타쵸우(坂下町)의 뒷골목 연립 주택에 살던 시절부터이다. 지금의 시노바즈(下忍) 거리를 당시는 칭칭 전차라고 하여 시전(市電)이 달리고 있었다. 그 도캉야마시타(道灌山下) 정류장에서 좁은 골목에 들어간 곳에 있는 네 채 연립 주택의 한 모퉁이 우리 집이었다. 아마도 쇼와(昭和) 九(1934)년에 내가 네 살, 여동생이 두 살 때의 이야기이다.

언제쯤부터인가 아버지는 야키토리(참새구이)가게를 하고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구이집이 아니라, 오리, 메추라기, 꿩 등 순수한 새 구이 집이었다. 아버지의 본집은 우에노마츠자카야(上野松坂屋) 앞의 우동 집이었기 때문에 요리는 잘했다. 거기서 시노바즈대로(不忍通り) 의 네즈(根津)에서 야키토리(焼鳥屋) 가게를 시작한 것이다. 네즈(根津)에는 신사(神社)가 있었고, 영화관, 유곽(遊郭)도 있었다. 타나카(谷中), 셍다기(千駄木)에는 문인(文人)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아버지의 야키토리 가게에 오곤 했었다고 한다. 그것이 중일전쟁(中日戰爭) 무렵부터 아버지의 인생을 개척한 것인데, 그것은 아직 나중 일이다. 어쨌든 우리 집은 가난하면서도 그럭저럭 생활은 안정되고 있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야키토리 가게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밤에는 거의 없었다. 우리 오누이는 아버지가 없어도 어머니가 있으면 좋으련만, 어느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곧 돌아올테까 얌전히 집 잘 보고 있어야 해" 하는 정도로 말하고, 어머니가 나가셨다. 저녁 때 가 가까이 오고, 주변 어두워져도 돌아오지 않았다. 여동생이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왠지 슬퍼졌지만 네 살이다. 사내아이다. 곧 울지는 않았지만, 여동생이 너무 심하게 울어서 나도 왠지 슬퍼지고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느 정도 둘이 울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오랜 시간이 아니지만 어머니가 돌아왔을 때, 둘이서 어머니를 붙들고 와와 울었다.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없는 불안을 마음껏 호소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우리를 안아 주었을 때의 안도감과 달콤한 냄새는 그로부터 팔십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소화 12 (1937)년 칠월 초이레, 칠석(七夕)날 오후 10시 40분, 베이징(北京) 근교 노구교(盧溝橋) 부근에서 야간 훈련 중 일본군에 한발의 총알이 날아들었다. 아직도 누가 쏘았는지 이설이 많고 알지 못한다. 어쨌든 이 한 방이 계기가 되어 일중(日中)의 충돌로 발전했다. 요컨대, 만주 사변 이후 중국인 항일 의식은 매우 앙등했고, 북평(北平)(北京), 상하이 등에 주둔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9일에는 현지에서 정전협정(停戰協定)이 성립했지만, 일본정부는 11일에 내지(內地) 삼개사단의 파병성명(派兵聲明)을 냈다.

그로부터 얼마 있지 않은, 칠월 중인 것 같다. 아버지에게 소집영장(召集令狀)이 왔다. 아버지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자신을 대정(大正) 십년병(十年兵)이라고 말했다. 왕년의 남자는 자신의 나이가 스무 살에서 징병 검사를 받은 연차(年次)라고 말하는 이가 많았다. 그래서 소와 12 년에 서른다섯 살, 후비역(後備役) 직전이다. 고사포와 청음기 옆에서 찍은 사진이 있으니까, 특수 교육을 받은 병사로 소집된 것일까.

아버지가 출정(出征)했을 때 일은 어렴풋하게 기억한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던 해인, 두살 아래 여동생과 손을 잡고 아버지 뒤를 따라서 마을을 행진한 것이다. 우리 뒤에는 일장기를 흔들었다 아저씨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캇테 쿠루조토 이사마시꾸" 하고 노래가 되풀이하여 불리고 있었다. 어디까지 걸었는지. 나는 읍내에서 시노바즈대(不忍通り)로 걸어 나간 기억밖에 없다. 난생 처음, 어쩐지 겸연쩍은 추억이다.

그 때 어머니는 어디 있었을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에게 이끌려서 여동생과 코우노다이(国府台)에 있는 아버지를 면회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코노다이(国府台)는 도쿄 토코 에도강(東京東郊江戸川)을 끼고 있는 대지(台地)이다. 메이지(明治)가 되고 나라시노(習志野)부터 고노다이에 이르기까지 육군의 시설이 여러가지 놓이게 됐다. 코노다이는 중화기 포병 관계의 시설을 두고 있었다. 군사사(軍事史)에 따르면 제일차대전(第一次大戰) 후에 비행기가 등장하면서 그에 대응하기 위한 고사포 부대가 코노다이에 설치되었다. 덩치가 좋았던 아버지는 이 부대에서 초기훈련을 받은 군인이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가장 먼저 소집되어 버렸던 것이다.

아버지는 소집되고 얼마 정도 코노다이에 있었을까. 국내 사단파병(師團派兵)은 일단 연기됐으나, 7월 29일에는 다시 파병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8월 20일에는 종결이 완료되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8월 중순까지 코노다이에 있었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그 사이의 일이다. 저와 여동생은 어머니의 권유로 몇 번 아버지의 면회를 갔다. 그때의 어머니는 여름의 얇은 옷을 입고 있었고 왠지 좋은 향기가 났다. 옷소매가 나풀거리고 어쩐지 밝고 흥겨운 느낌은 아이들에게도 전해진다. 나도 여동생도 건너뛰기를 하고 걸어가고 있었다. 우에노역(上野駅)인지 닛포리역(日暮里駅)에서부터 철도선 전철(현재 JR)를 타고 가는데, 계단을 오르고 역에 갔던 기억이 있으니까 닛포리 역일 것이다. 지금의 소부선(総武線)을 타고 큰 강(아라카와, 에도가와)과 작은 강을 몇 개 건너가니까 고노다이이다. 지금이라면 3~40분이지만 당시는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 어쨌든 도착한 것은 항상 황혼 근처였다고 생각한다. 역을 나와서, 에도가와 제방다운 풀밭을 기모노 차림의 어머니를 전후해서 걷거나 달리거나 했을 때의 생동감이 어쩐지 지금도 떠올라온다. 왜냐하면,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소아 결핵을 앓고 절대 안정을 2 년간이나 하다 보니 운동 신경이 퇴화하고 둔중(鈍重)한 인간이 되어 버렸지만, 유아기는 그래도 꽤 활발하게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군인이 된 아버지와의 만남이지만, 그 장소는 병사(兵士)의 입초(立哨)하고 있는 병영(兵營)이 아니었다. 짚으로 이은 지붕의 농가(農家) 마당이었다. 아마 급거(急遽)히 소집된 병사(兵士)는 병사(兵舍)가 꽉 차서 수용(收容)하지 못하고, 훈련이 끝난 뒤에는 농가에 분숙(分宿)했던 것이다. 우리는 저녁 무렵, 그 농가에 몇 번인가 갔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군인이 된 아빠를 만난 기억이 별로 없다. 당연히 있지만, 수염 난 무서운 군인 아저씨가 뚫어지게 나를 보는 것만으로 왠지 가까이 있던 아버지가 아닌 느낌이 들어 별로 친해질 수 없었던 것이다. 여동생은 안고 있던 것 같지만, 나는 그런 기억도 없다.

기억에 있는 것은 여동생과 함께 모르는 군인 아저씨들과 숨바꼭질 같은 것을 하고 둑에 올라가기도 하고 뒤를 쫓아가기도 하면서 꽤 오랜 시간, 어둑어둑할 때까지 놀았던 것뿐이다. 얼마만큼의 시간 놀고 있었는지. 어머니의 모습이 안 보이기 때문에 매우 불안했음을 기억하고 있다. 여동생은 "엄마!" 하고 울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동생은 어린 시절 잘 울곤 했다.

그 때 엄마는 어디에 있었던 걸까..

돌아오는 전차 안에서 나는 어머니의 무릎에 머리를 얹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어머니가 곁에 있는 안도감뿐 아니라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온기가 있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나는 어머니의 무릎에 기댄 채 깊이 잠들었다. -끝-

       

        

                  河田 宏

                 nonfiction 作家

綠風會 會員

「にんにく」の匂い

私は戦争(第二次大戦)が終わるまで、いや終わってもしばらくにんにくの匂いをしらなかった。

私が中学三年生のとき戦争は終わったが、勉強はあまりせず、本ばかり読んでいた。いつも飢えていたが、それ以上に心が飢えていたからであろう。教師も親も頼りにならなかった。戦後五年目に大学の文学部に入った。朝鮮戦争が始まった年である。

ここで多士済々な友人に出会った。満州、朝鮮からの引揚者も多い。ある日、本人は江田島の兵学校にいたが、家族は満州から引き揚げてきた友人の家に泊まり込んで御馳走になった。といっても当時のことだから漬物だけだったが、その香りといい、味といいあまりにおいしかったので、翌日少しばかりもらって帰って来た。

ところが家に入るとたちまち父に棄てられてしまったのである。

「こんなニンニク臭いもの持ってくるな!」

めったに嫌惡の情を示さない父が、我慢ならぬという態度であった。

私は抗するすべもなかった。そして考えた。日中戦争初期、中国戦線に出征していた父は、短片的に当時のことを話すことがあった。そして「あの匂いはイヤだったな」言っていた。私は「遺棄死体数百といい数千という いのちをふたつもつものなし」(土岐善려)のような情景と匂いかと思っていたが、そうではなかった。中国の街や村の漂う「ニンニク」の匂いについてだった。そしてそれが差別表現になっていたのである。

なお土岐善려の短歌はいのちの大切さを詩ったものである。

梶井基次郎に「大蒜」という作品がある。旧制高校生時代の屆託を、有名書店の美術書の上に紡錘形で色鮮やかなレモンを置いて大爆発を夢想するという纖細で簡潔な短編「檸檬」でしられる作家だ。「大蒜」は彼の作品のなかではあまり知られていない。主人公が中学高学年のとき、新任の柔道師範に「ニンニク」と渾名をつけて同級生から人目おかれたという話である。私が記憶しているのはその師範が河田という姓だったからであった。河田は「ニンニク」としきりにからかわれていた。ところが渾名をつけた主人公も同級生も「ニンニク」はみたことも食べたこともないのである。知識として知っているだけであった。それが偏見ともなっていた。大方の日本人は、戦後に在日の人たちとの交流が繁くなるまで縁がなかったように思える。

しかし韓国に大蒜は欠かせない。なにしろ天神の子桓雄は太白山に住む熊にヨモギ一束とニンニク二十粒を与え、これを食べて百日間穴倉にいて人間になったのが朝鮮人の先祖だという神話があるくらいだから、当然のことである。ニンニクのない韓国料理などありえない。

私は学生時代に新宿の屋台で燒酒を呑みだしたころから、ニンニクの匂いが嫌いではなかった。ほんとうに好きになったのは、朝鮮、韓国に関心を持ち、本を読み、在日の友人もでき、韓国にしばしばいくようになってからである。ニンニクの効いた朝鮮漬とマッコリがあれば、それだけで十分である。

母の匂い

私がものごころついたのは東京市本郷区(現文京区)坂下町の裏長屋に住んでいたころからである。いまの不忍通りを当時はチンチン電車といっていた市電が走っていた。その道灌山下停留所から細い路地に入ったところにある四軒長屋のいっかくが我が家であった。おそらく昭和九(1914)年で私が四歳、妹が二歳のころの話である。

いつごろからか、父はヤキトリ屋をしていた。いまのもつ焼きでなく、鴨, 鶉, 雉子など純粹な焼鳥屋である。父は実家が上野松坂屋まえの饂飩屋だったので料理はうまかった。そこで不忍通りの根津でヤキトリ屋を始めたのであろう。根津は神社あり、映画館あり、遊郭もあった。谷中、千駄木には文人が多く、その人たちもちちのヤキトリ屋に来ていたという。それが日中戦争あたりからちちの人生を拓くことになるのだが、それはまだ先の話だ。とにかく我が家は貧しいながら何とか生活は安定してきていたらしい。

そのころ父はヤキトリ屋をやっているから、夜はほとんどいなかったようだ。私たち兄妹は父がいなくても母がいればよいのだが、ある日何かの用事があたのであろう「すぐ帰るからおとなしくお留守するのよ」ぐらいのことは言って、母が出かけて行った。日暮れ近くであったろうか。所が暗くなっても帰って来ない。妹が泣き出した。私も何だか悲しくなってきたが四歳である。男の子である。すぐになきはしなかったが、妹があんまり激しく泣くので私も何だか悲しくなってきて、とうとう泣き出してしまった。どのくらい二人で泣いていたかわからないが、ずいぶん泣いていたような気がする。いま思えばそれほど長い時間ではなかったのだろうが、母が帰ってきたとき、二人で母にしがみつき、ワーワー泣いた。幼いながら母のいなかった不安を思いきり訴えたかったのであろう。母が私たちを抱きしめてくれたときの安堵感と甘い匂いは、あれから八十年たっても思い出す。

昭和十二(1937)年 七月七日、七夕の日の午後十時四十分、北京近郊の盧溝橋付近で夜間演習中の日本軍に一発の銃弾が撃ち込まれた。いまだに誰が撃ったのかは諸説あってわかっていない。とにかくこの一発が契機になって日中の衝突に発展してしまった。要するに、満州事変以来、中国人の抗日意識は非常に昻っていて、北平(北京), 上海などに駐屯していた日本軍と中国軍の間には一觸卽發の状態が続いていたのである。九日には現地で停戦協定が成立したが。日本政府は十一日に内地三個師団の派兵声明を出した。

それから間もなくである。七月中であったらしいが、父に召集令状が来た。父は誰かと話していて、自分のことを大正十年兵と言っていた。往時の男は自分の歳を二十歳で徴兵検査を受けた年次で言うことが多い。だから昭和十二年には三十五歳、後備役ぎりぎりである。高射砲や聽音機の傍で撮った写真があるから、特殊教育を受けた兵士として召集されたのであろうか。

父が出征したときのことはおぼろげにおぼえている。私が小学校に入った年であり、二歳下の妹と手を繋いで父の後ろに続いて町内を行進したのである。 私たちの後には日の丸の旗を振ったおじさんたちがぞろぞろと続いていた。「カッテクルゾトイサマシク」の歌がくり返し歌われていた。どこまであるいたのか。私には町内から不忍通りに出て歩いている記憶しかない。生まれて初めての、何となく晴がましい思い出である。

そのとき母はどこにいたのだろうか。記憶にあるのは、母に連れられて妹とコウノダイにいる父に面会に行ったときのことである。

国府台は東京東郊江戸川に沿った台地である。明治になって習志野から国府台にかけて陸軍の施設がいろいろ置かれるようなった。国府台は重火器砲兵關係の施設がおかれていた。軍事史によると、第一次大戦後で飛行機が登場してから、それに対応するための高射砲部隊が国府台に設置されている。体格の良かった父はこの部隊で初期訓練を受けた兵隊だっ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だから真っ先に召集されてしまったのだ。

父は召集されてからどのくらい国府台にいたのか。内地師団の派兵はいったん延期されていたが、七月二十九日には改めて派兵が決定されている。そして八月20日には終結が完了している。だから、父が八月中旬まで国府台にいたとみて間違いない。

その間であろう。私と妹は母に連れられて何回か父の面会に行った。そのときの母は夏の薄手の着物を着ていて、なんだかいい香りがしていた。着物の袖がひらひらして、何となく華やいだ感じは子供にもつたわってくる。私も妹もスキップをしてあるいていた。上野駅か日暮里駅から省線電車(いまのJR)に乗って行くのだが、階段を上がって駅に行った記憶があるから日暮里駅であろう。いまの総武線に乗り、大きな川(荒川、江戸川)と小さな川をいくつか渡ると国府台である。いまなら三~四十分だが、当時はどのくらいかかったのだろうか。とにかく着いたのはいつも夕暮れ近くだったと思う。駅を出て、江戸川の堤防らしき草っ原を、着物姿の母に前後して歩いたり走ったりしたときの躍動感は何となくいまも思い出す。というのも、私は小学校二年あたりから小兒結核を患い、絶対安静を二年間もしているうちにすっかり運動神経が退化して鈍重な人間になってしまったが、幼兒期はけっこう活発に遊んでいたのである。

さて、兵隊となった父との面会だが、その場所は兵士の立哨している兵營ではなかった。藁葺屋根の農家の庭先であった。おそらく、急遽召集された兵士は兵舍が滿杯で收容しきれず、訓練が終わった後は農家に分宿していたのであろう。私たちは夕方、その農家に何回か行ったのだ。ところが、私は兵隊になった父に会った記憶があまりない。当然あるのだが、ヒゲの生えたおっかない兵隊さんがジロジロと私を見るだけで、何だか身近にいた父ではないような感じがして、あまり親しめなかったのだ。妹は抱きあげられていたようだが、私にはそんな記憶もない。

記憶にあるのは、妹と一緒に知らない兵隊さんと鬼ごっこみたいなことをして土手を駆け上がったり、追い掛けッコをしたりして、かなり長い時間、薄暗くなるまで遊んでいたことだけである。どのくらいの時間遊んでいたのだろうか。母の姿が見えないので、とても心細くなってきたのを覚えている。妹なんか「おかあちゃん!」と泣き出していたかもしれない。とにかく妹は幼いころよく泣いていた。

そのとき、母はどこにいたのだろう。

かえりの電車のなかで、私は母の膝に頭をのせてうつらうつらしていた。母が傍にいる安心感だけでなく、何ともいえない温もりがあって、甘ったるい匂いがしていた。私は母の膝にもたれたまま深く眠り込んでい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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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냄새
  • 2017-11-15
  • 김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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