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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의 植民地 統治實態 1944年 (昭和19) 

  • 김학도
  • 조회 : 1249
  • 2017.09.03 오전 09:39



1944年 (昭和19)  

日本帝國은 日本軍 占領地에서 急造된 傀儡政府(満州, 中國의 王精衛政権, 타이 미얀마―, 필리핀 등)의 代表를 모으고 [大東亜共栄圏 宣言]을 發表했다. 共存 共栄, 自主獨立, 人種差別이 없는 [大東亜共栄圏](注)을 建設함으로써, 世界 平和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總督府는 女子 挺身隊 勤務令을 公布하고, 12歲 以上 40歳 未満의 配偶者가 없는 젊은 女性을 [挺身隊]라고 하는 이름으로 日本이나 中國, 南洋各地로 보냈다.

오랜 戰争의 餘波로 서울 市街의 店舗는 진열장에 먼지가 쌓이면서 미나카이(三中井), 미츠코시(三越) 등 百貨店의 진열장도 텅 비어 있었다. 사람들은 굶주려 피부가 누렇게 붓고, 피곤해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日本帝國은 最後의 勝利를 위해 참고 견디라고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나 [日本帝國号]는 太平洋 바다에 서서히 沈沒하고 있었다.

7月 25日, 日本의 總理大臣이 된 小磯國昭 總督에 代替하여 第10代 째로 最後의 朝鮮 總督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赴任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赴任 聲明을 發表했다. [이제 聖戰은 最後의 段階에 이르렀다. “鬼畜米英”은 最後의 발버둥질을 하고 있다]고, 그의 聲明이 發表된 지 사흘 만에, 韓半島 上空에 歴史上 처음으로 美國의 B29 爆撃機가 나타났다. 呂運亨은 日本의 敗戰에 對備하여 地下 秘密 團體의 建國 同盟을 組織했다. 中國 重慶에 있던 大韓民國 臨時政府는, 中國 美國 소련 등 30여개國에 大韓民國 臨時政府 承認을 要請했다.

強制徴用된 韓國人들은 사할린, 南洋群島, 中國, 東南亞의 鑛山, 飛行場 등 建設 工事場에서 일했다. 저들은 事實上 賃金을 받지 못했다. 郵便貯金, 銀行積立金, 債権買入, 保険 등 각종 名目으로 賃金을 差押 당했기 때문이다. 日本이 敗戰하자, 빗나간 証書는 휴지가 되었다. 그래도 徴用 現場에서 목숨만이라도 건진 것은 다행이었다. 徴用者 中에서는 安全 事故로 죽었는지, 상처받은 사람, 拷問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사람도 많다.

 [注] 大東亜共栄圏:第2次 世界大戰 當時, 日本帝國이 아시아 諸國을 侵略하고 내 세운 슬로건이다.

[大東亜]라는 것은 東亜, 즉 東아시아에 東南아시아를 포함한 地域을 가리키는 말로서, 1940年 [昭和15] 7月 26日, 日本帝國이 國策 要綱으로서 [大東亜 新秩序 建設方針]을 내걸고 最初로 使用한 國防 國家의 用語이다. 第2次 世界大戰에 介入한 直後인 1941年 12月 12日에는, 이 戰争을 大東亜戰争이라고 稱할 것을 決定하고, 戰争目的이 [大東亜 建設]에 있다고 主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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