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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의 植民地 統治實態 1931年 (昭和6)

  • 김학도
  • 조회 : 1145
  • 2017.08.31 오후 06:15



1931年 (昭和6)

5月 下旬부터 満州 長春 近郊의 萬寶山 三姓堡에서, 朝鮮人 農民과 中國人 사이에서 水路問題로 紛糾가 일어났다. 이러한 紛糾는 中國 東北地方에서 종종 일어났던 일로서, 人命被害도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看過한 事件이었다. 7月 2日, 満州 吉林省 萬宝山에서 水路工事問題로 韓中農民이 衝突하는 [萬宝山事件](注1)이 일어났는데, 日本의 関東軍이 이것을 利用하면서 問題가 擴大되었다. 게다가 國内의 新聞이 큰 被害가 있는 것처럼 報道했기 때문에, 國内에서는 居住하는 華僑에게 報復하는 事態가 일어나, 한편 中國에서도 韓國人에 대한 報復事態가 이어졌다.

뉴욕發 大恐慌의 颱風이 全世界를 덮쳤다. 美國은 大恐慌 發生 1年 째에 銀行 1,300餘箇所가 문을 닫았고, 預金者는 瞬息間에 거지같은 身勢가 되고, 銀行職員은 失業者로 轉落했다. 大恐慌의 餘波는 유럽의 影響 아래 있던 아시아 아프리카의 植民地등도 大恐慌의 餘波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日本은 世界 大恐慌에서 빚어진 經濟 難局을 打開하려고 [満州事変](注2)을 일으켰다. 9月 18日, 日本의 関東軍이 奉天 外郭의 柳条湖 付近의 南満州 鐵道를 爆破한 後, 이것을 中國軍의 일로 몰아넣고, 軍事要地에 일제히 砲撃을 퍼부었다. 이것이 이른바 [柳条湖 事件]이다. 그 後 日本軍은 満州 軍閥의 張作霖을 暗殺했기 때문에, 그 아들 張學良이 中國 國民黨과 손을 잡고 日本軍에 저항했다. 臨時政府가 三均制度를 大韓民國 建國 原則으로 闡明했다. 三均制度는 趙素昻이 提唱한 三均主義로, 政治의 均等化, 經濟의 均等化, 教育의 均等化를 意味한다. 1月 19日, 朝鮮語 研究會를 朝鮮 語學會로 改稱했다. 2月, 總督府는 日本에 留學하고 있는 學生数를 4354 名이라고 發表했다. 6月 17日, 第6代 總督 斉藤實가 辞職하고, 後任의 第7代 總督으로 第4代 總督이었던 宇垣一成가 就任했다.

 [注1] 萬宝山事件:中國 吉林省 長春県 萬宝山 地域에서, 日本帝國의 術策에 의한 朝鮮人 農民과 中國人 農民이 展開한 流血事件. 이 事件의 本質은, 満州에서 勢力를 形成한 中國 民族運動 勢力과 朝鮮人 民族運動 勢力과 共同 戰線 闘争에 對하여, 이것을 分裂시키려는 日本帝國의 緻密한 陰謀였다. 이것을 満州侵略과 大陸侵奪의 발판으로 하여, 國際的으로 自身의 立場을 有利하게 하려는 術策이었다.

[注2] 満州事変:이 해의 9月 18日, 柳条湖 事件으로 비롯한 日本의 満州 侵略戰争. 満州軍閥 張作霖 爆殺事件 以後, 그의 아들 張學良이 國民黨과 손을 잡고 日本에 抵抗하는 態度를 보이는 한편, 소련이 安定된 經濟發展을 이루자, 이에 刺激된 日本軍部와 右翼 勢力中에서 満州를 植民地化하고, 主要資源과 軍儒物資의 供給地로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活發했다.

 関東軍 参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 등을 中心으로 満州 侵略 計劃을 謀議한 그들은 自身의 管轄이었던 満州 鐵道를 스스로 破壊하고, 이것을 中國側의 일이라는 口實을 만들어 軍事行動을 開始했다. 関東軍은 電撃的인 軍事作戰으로 満州 全域을 占領하고, 1932年3月, 傀儡 満州國을 세워 實質的인 支配権을 行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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