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年 (大正14) 内紛을 거듭하고 있던 臨時政府가 새로운 活路을 찾으려고, 臨時 議政院에서는 憲法改正 · 内政整頓 · 外交實行化 등의 새로운 方針을 밝혀, 大統領을 選出한 것에 이어 憲法改正案을 決議했다. 從來의 大統領制를 없애고 國務領 中心의 内閣責任制를 採択하고, 憲法適用 範囲를 國民으로부터 光復運動者로 限定했다. 9月24日、李相龍이 臨時 첫 國務領에 選任되었다. 이보다 먼저 4月17日, 서울에서 秘密裏에 朝鮮共産黨 創黨大會가 열렸다. 저들은 [朝鮮은 朝鮮人의 朝鮮이다]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階級解放과 民族解放을 同時에 追求했다. 満州의 獨立軍 弾壓과 韓國人의 단속을 強化할 目的으로, 日本은 中國과 소위 [三矢協定](注1)을 奉天에서 締結했다. 이 協定으로 國内뿐만 아니라 中國 東北三省에서도 獨立運動家의 목이 졸렸다. 協定의 主要 内容은 [朝鮮人의 武装携帯와 朝鮮内 侵入을 厳禁하여, 違反하는 者는 檢擧하여 朝鮮側 官憲에게 넘긴다] 고 하는 것이다. 이것에 의하여 満州에서의 獨立運動이 점점 어려워졌다. 日本 植民地史學者들이 [任那日本府説](注2)을 主張하여 朴殷植· 申采浩 등 韓國의 歴史學者들을 憤怒하게 했다. 任那 日本府說은, 日本帝國이 廣開土大王碑文을 歪曲解釈하여, 朝鮮侵略과 植民地 支配를 正當化하려고 하여, 4世紀부터 6世紀까지 日本이 朝鮮에 統治機構를 세워 韓半島 南部地方을 다스렸다고 하는 捏造된 學説이었다. [朝鮮文壇]·[開闢] 등 文藝誌에, 많은 文人·作家들의 投稿가 活發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年末에는 朴英熙·金基鎮 등이, 進歩的인 文學藝術運動團體인 [朝鮮프로레타리아 藝術家同盟(KAPF)]을 結成하여 活動을 넓혔다. 이 時期 KAPF에 参加하지 않았지만, 그 方向을 함께 하고 추종할 [同伴者作家]도 있었다. 10月 15日, 京城 運動場이 完工되고 各種 陸上大會가 열렸고, 때로는 日本帝國이 主導하는 各種忠誠盟誓의集會場으로서도 使用되었다. [注1] 三矢協定:이 해의 6月 11日, 当時 満州를 支配하고 있던 張作霖麾下 奉天省 警務處長 于珍과 朝鮮總督府 警務局長 미츠야 미야마츠(三矢宮松)와의 사이에 맺어진 [不逞鮮人의 단속에 関한 双方協定]으로 満州에 居住하는 韓國人과 獨立軍을 단속하기 위한 것이다. [注2] 任那日本府説:日本의 야마도 정권(大和政権)이 四世紀 後半, 韓半島 南部地域으로 進出하여 百済 • 新羅 • 伽耶를 支配하고, 特히 伽耶에는 日本府라고 하는 機関을 두고 六世紀 中葉까지 直接 統治하였다는 主張이다. 古代의 韓半島 南部 全體가 日本의 支配下에 있었다고 하는 論理가 되어 [南鮮経営説]이라고도 한다. 日本의 歴史歪曲 事例의 하나로서, 2010年(平成22)3月, 韓 • 日 歴史共同研究會에서 이것은 事實이 아니라고 하는 合意하에, 用語 自體를 廢棄하도록 合意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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