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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의 植民地 統治實態 1924年 (大正 13)

  • 김학도
  • 조회 : 1140
  • 2017.08.30 오후 07:28

日帝의 植民地 統治實態

1924年 (大正13)

臨時政府의 內紛은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라앉지 않았다. 1년 사이에 首腦部가 몇 번이나 바뀌었다. 임시정부 내부에는 크게는 右派와 左派. 작게는 러시아領·滿洲系의 創造派, 國內 · 美洲系 改造派 金九 · 李東寧系의 臨時政府 固守派 등 많은 系派가 서로 複雜하게 엇갈리고 路線 葛藤을 보였다.

臨時政府 内部의 改造派는 主로 民族主義 人士들로 되어 있는 反面, 改造派는 社會主義와 그것에 同調하는 人士가 主流를 이뤘다. 改造派는 基本的으로 外交를 重視하는 것에 비하여, 創造派는 日本帝國에 맞서 武装闘争을 主張하여 좀처럼 内紛이 가라앉지 않았다. 다행이 年末에 朴殷植이 臨時國務總理(大統領 職務代理)에 選出되어, 臨時로 内紛이 多少는 鎮静한 듯 보였다.

4月 17日, 京城 YMCA에서 朝鮮勞農總同盟이 結成되었다. 이 同盟은 社會主義者들에 의하여 主導되었다. 義血團 金祉燮이 日本의 宮城을 爆破하려고 二重橋 다리에 爆弾 두 발 을 投下하고 日本社會에 衝擊을 주었다. 参議部 所属 獨立軍 張昌憲 등이, 國境을 視察中이던 朝鮮 總督 斉藤實을 鴨綠江에서 襲撃하였지만, 未遂로 끝났다. 또 武装 獨立團이 警察官 駐在所를 襲撃할 事件이 各地에서 일어났다.

[韓日併合] 後, 小作 争議가 毎年 늘어났다. 日本人 地主가 幾何學的으로 늘어나는 것에 比例하여 小作農民의 数가 急増하고, 小作料가 以前보다 2~3割 높아졌기 때문이다. [併合] 以前은 地主와 小作人 사이에서 대부분 口頭로 契約되면서, 地主가 特別한 事情이 있던지 小作人의 背信行為가 없는 限, 小作契約은 持續되었다. 하지만 [併合] 以後, 小作料와 小作権의 移動이 問題였다.

朝鮮總督府는 植民地 支配의 効率을 높이기 위하여, 이 해 5月에 總督府令으로 京城帝國大學(現서울大學)을 設立했다. 開校 當時 學生 168名 중 韓國人學生은 44名에 불과하였다. 李光洙는 [東亜日報]에 [民族的 經綸]을 連載하여 自治論을 主張함으로 國内外에 波紋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崔鉉培는 [朝鮮民族 更生의 길]을 發表하여 愛國愛族思想을 널리 퍼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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