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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렙회

被爆者들의 經驗談[1]

  • 김학도
  • 조회 : 2610
  • 2017.08.14 오전 11:04

 

          被爆者들의 經驗談[1]


        아이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엎드린 상태 

         그 위에 집이 무너져 깔리다


韓国人被爆者(渡日治療) 姜 順 伊

(現住所)

大韓民國 釜山特別市沙下區槐亭洞 458-45



① 열 살에 일본으로 건너와 · 야마구치현(山口県)의 山 속으로

나의 아버지는 먼저 일본에 와 계셨다.

언제쯤, 이곳으로 오셨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제가 열 살 때, 엄마와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 이렇게 넷이 일본에 왔습니다.

일본에 가면,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 부푼 가슴으로 왔습니다.

아빠는 시모노세키(下關)에까지 마중 나와 계셨고, 따라서 갔습니다만, 산, 산, 산, 산, 산으로 들어가는데 · · · 엄청 시골이었습니다.

오직 산과 밭밖에 보이지 않고, 하루 사람을 세 사람만 보아도 많이 본 셈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저쪽 산에서 나무를 베었고, 아빠는 이쪽 산에 있는 나무들을 베고 잘랐습니다.

일본인에게서 기계를 빌려서 나무를 자르는 일을 하고, 매일 얼마쯤의 돈을 받곤하셨습니다.

(*移動製材…베어 눕힌 재목을 현지에서 가공하여 널판으로 만드는 일이 있었습니다)

집은 큰 것을 빌려 매월 집세를 물었습니다.

우리는 매우 쓸쓸했습니다. 아무도 없으니까요…。

여기가 일본인가…어쨌든 좋았습니다.

놀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아빠를 따라서 산 속으로….

하지만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어요. 도시락 싸가지고 아빠를 따라갔지만, 함께 놀 친구도 없으니까 그냥 있다가 아빠와 함께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그저 산에서 여기 저기 뛰어 놀다가 돌아오곤 했지요. 아주 심심했어요.

외롭고 쓸쓸해서 부산으로 돌아가자고 해서 부모를 난처하게 했어요.

말도 못하고……. 남동생이나 여동생은 학교에 다녔지만, 나는 나이가 많아서 학교에 들어가지 못 했어요……그 시골에는 내가 갈 수 있는 학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못 들어가서 다니지 못했습니다.


②広島에 왔고~挺身隊를 피하려고 結婚~

아빠의 친척이 広島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두 살 때에 広島에 왔지요.

니시하라(西原(現·安佐南区西原)에···.

탠마(天満)에 있는 공장 부근의 숲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배로 오타 강(太田川)의 모래와 자갈을 모으는 일을 하고. 나는 집에 있었습니다.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으니까요...

니시하라에서 4년 있었으니, 나의 나이 열여섯 살이 됐지요.

그 무렵, 모두 만세를 불렀습니다. 매달 모여서····(소화 16년 12월 8일의 대미영선전포고(対米英宣戦布告)를 기념하여, 그 다음 해 1월 8일을 제1회로 하여 그 이후 매월 8일을 대소봉대일(大詔奉戴日)로 정하고 국민의 전의고양(戦意高揚)을 도모하다)····나로서는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와서 둘 다 울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 여자로서 열다섯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는 정신대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디 맞선 볼 사람은 없을까 하고, 찾아서 결혼시키기로 했습니다.

결혼한 자는 정신(艇身隊)에 데리고 가지 않는다고 하여, 찾는 중에 후꾸시마쵸(福島町) 쪽에 22 세의 사람이 있다고 하여, 그 사람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나는 아직 겨우 열여섯 살이었지요.

내가 너무 어리니까, 아버지는 내가 스무 살이 되면 데리고 가도록 부탁했지만, 상대편 쪽에 할머니가 계셔서 당장 데리고 가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정신대로 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하시면서, 당장 데리고 가도록 해서 간 것입니다.

정신대라고 하면, 공장에 다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군인들의 부인이 되는 것입니다!

엄청 많은 군인들이 줄을 서서·······!한국의 아가씨를 데리고········!

군인들은 부인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방에 데리고 들어가서, 하룻밤에 30 명, 40 명도·····. 처음에는 일하는 곳으로 데리고 간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요! 정신대(挺身隊)에 끌려갔던 사람이 지금 살아계셔서, 한국에 있잖아요!

(*姜 씨가, 갑자기, 어조(語調)가 세차게 내리치듯이 격해졌다. 녹음을 그대로 수록)


③出産~被爆~

주인은 미쯔비시(三菱)의 운전수로, 트럭을 타고 화물을 싣고 운반했습니다.

17 세 때에 나도 일하러 나갔어요……탠마쵸(天満町)로 가는 다리를 건너 좌측에 통조림의 켄(缶)을 만드는 회사가 있는데, 거기에 다녔지요.

1 년 좀 지나서 임심이 되어, 회사를 쉬었는데 5월 27일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회사로부터 선물(※祝賀)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쌀이랑 밀가루 기저귀 등등……산파도 많은 선물을 가지고 왔어요.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말이에요. 그것도 기념일에 사내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말입니다. (※海軍記念日·明治38年 5月 27日·日本海軍이 日本海에서 러시아 海軍에大勝)

산파(産婆)가 이름까지 지어 왔어요. 카즈요시(カズヨシ)라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은 이름은 아츠요시(アツヨシ)라고요, 이 아이는 이름이 둘이에요.

돌(생일)을 지나고, 다시 회사에 나갔어요 · · ·저는 회사에 아이를 데리고 간 적은 없지만, 그 무렵은 5분·10분 늦었어요. 그날 아침도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채우려고 할 때에 집이 무너져 그 밑에 깔렸습니다. ····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기저귀를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 위에 이렇게 엎어진 상태로 집에 깔렸는데, 흙이 마구 쏟아져 내리고, 괴로워도 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어요. 다만 울고만 있었어요. 바깥이 이 정도(엄지손가락 크기)로 열려 밝아 보였어요·····, 거기서 소리도 크게 지르지 못하고 그냥 살려달라고만 하고 울고 있었지요. 아이는 아이대로 울고 나는 나대로 울고·····, 그랬는데 밖에서 누군가 남자 목소리로「어디냐!」라기에, 「여기에요-, 살려주세요!」라고 하니, 그 사람이「뭔가 가지고-」 하더니, 이 정도의 구멍이 뚫린 거에요. 아마 머리 정도로····.


④ 二人의恩人

그것은 이웃의 타카라(タカラ田原?)아저씨였어요. 아저씨가 아니고 남편이었어요. 생명의 은인이에요.

타카라 아저씨는 일본인이며, 도살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바로 옆에 있었다.

(타카라 아저씨와 그의 부인 아주머니는 후에 도일치료(渡日治療) 때 만나서 함 께 식사도 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해서 구조되어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가까운 소학교에 갔었는데 어찌나 사람이 많아서, 「당신의 아이가 피를 흘리고 있어요」라고 하기에, 안고 있는 아이가 피를 흘리고 있어도 어디 씻을 데도 없고 ······고히역(己斐駅)으로 가는 다리 이쪽 편에 방천 뚝이 있는데, 거기에 지나오면서 보니 화상(火傷)을 입은 사람이 많았다.

좀 건강한 사람들은 다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나도 따라 갔다. 따라서 가보니 고히역(己斐駅)의 저쪽 편····그곳은 소학교(小学校)였는데 사람이 너무 많이 모였다. 아이나 나도 ·····입고 있었던 것은 얇은 옷 하나뿐인데, 그것이 집이 무너질 때 걸려서 찢어지고 헤어져서 ···· 어린 아이의 것도 마찬가지로, 모자(母子) 모두 너덜너덜, 그래서 여기저기서 피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프지는 않고 피가 나오는 것도 몰랐다. 어린 아이를 무릎에 앉고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가족이 몇인가 있어도 나는 아이와 단 둘뿐이었는데, 아이는 울어대고 나도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고 있는데, 어디선가 아주머니 한 분이 와서,

「어머나, 아이도 불쌍해라, 자 자」라고 말했다.

「아주머니, 내가 뭔가 하나 가지고 올 테니 여기 꼼짝 말고 있어요」하고 어디론가 가셨다.

나는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처량한 모습을 보고 웃었으리라 생각했다.

아이에게, 여기를 이렇게 하여 가리우니까 그것을 보고 웃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다시 돌아와서「낡았지만」하고, 유카타(浴衣: 목욕한 뒤 또는 여름철에 입는 무명 홑옷)를 한 벌 건네주는 것이었다.

나는 울었어요, 너무 기뻐서요.

아이를 무릎에 앉고 웅크리고 있다가, 그것으로 아이의 것과 나의 것을, 소매가 없는 옷을 양쪽을 떼니까 그런대로 허리띠가 하나 생겼다.

띠고 무엇이고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 그것으로 아이를 업고 ····그 아주머니가, 우리 집은 없으니까 저기로 가자고 해서, 물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 주셔서, 피를 닦아주고 씻어주어서 ···· 그날 밤은 아주머니도 함께 있어 주셨다.

그 아주머니는 한국에 올 때에(帰国)인사하러 갔었지요. 그 후엔 볼 수가 없어요. 다시 일본에 왔으니까, 찾아 갔지만 만날 수 없어요, 집도 어딘지 알 수 없고요.


⑤ 골절(骨折)한 시누이(小姑)

그날 밤 늦게 남편(주인)이 시누이를 데리고 왔다.

시누이는 중학 1학년생(지금으로 말하자면)이었다. 그 때 학교 2층에 있었던 것 같아요. 2층에서 떨어져 뼈가 부러져 ···· 큰 뼈가 아니고 작은 뼈를, 그런데 뼈가 밖으로 튀어나왔어요.

그래서 걸을 수 없어서 남편(주인)이 업고 온 것입니다.

남편은 미츠비시(三菱)에 있었기 때문에, 조금 다치기는 했지만, 화상은 입지 않았어요.

시어머니는 휴지 사러 나가셨다. 마침 다리 밑에서 뭔가를 씻고 있었던 것 같아요. 상처 한 곳도 없었습니다.

남편이 시어머니을 찾아 나섰지만, 시어머니는 우리를 찾고 계셨던 것입니다.

시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유치원에 갔는데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어디에 갔을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뛰어 돌아 왔습니다. 시동생은 한 곳도 다친 데가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친척 집에 가셨는데, 아마도 방천 뚝 그늘진 곳에 계셨던 것 같아요. 할머니도 다친 데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모여 방공호에 들어가려 했지만, 보니까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하여 우리는 들어가지 않고 방공호 옆에 있었어요.

거기에 상처 입은 사람을 가득 실은 트럭이 와서, 「상처 입은 사람은 산속 어딘가에 있는 병원으로 데려고 가려하니 여기에 타시오」라고 하기에, 다리 골절이 된 시누이와 남편을 태우고 갔습니다.

나는 거기에 있을 수 없어서 친정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갔어요.


⑥ 니시하라(西原)의 부모님이 계신 곳····

니시하라의 어머니의 집도 절반은 무너졌고, 아버지는 화상을 잔득 입고 돌아와 치료를 받고 있었다.

아버지는 근로봉사(勤勞奉仕)하러 갔다가 화상을 입은 것이에요. 짧은 옷을 입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긴 옷을 입는 편이 좋겠죠.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은 숲 속에 가마니를 깔고 거기에 모두 있었습니다.

그래도 방공호보다 나으니까 거기에서 나도 두어 밤 지냈습니다.

거기에 군대 갔던 남편의 동생이 왔습니다.

남편의 동생은 원폭(原爆)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한 주간의 휴가라고 하면서 돌아온 것입니다.

히로시마(広島)에 와서 보니,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 하고 생각하니, 깜짝 놀라 찾아보니 방공호에서····라던가 말하면서요.

그 동생은 니시하라(西原)로부터 뭔가 잔득 가지고 갔어요.

(남편의 동생과 함께 그녀도 후꾸시마쵸(福島町)에 돌아갔다?)


⑦시누이를 도우려고 시골의 병원으로

가족을 볼 사람은 오라고 해서, 앞서 다친 사람을 태우고 갔던 트럭이 또 왔다.

그 때 시어머니는 ····저, 면(綿)으로 양말을 만드는 회사에 실이 많이 있다고 하여, 그 실을 모두가 가지고 간다고 하여 ···· 시어머니는 그걸 자기도 가지러 간다고 하여, 딸이 다쳤는데도 가지 않는 거에요. 할 수 없이 내가 트럭에 타고 시누이가 있는 곳에 갔어요.

시누이는 다친 곳이 다리이기 때문에 걸을 수 없는데, 아이도 있지, 그래서 내가 업을 수 없었지요.

환자가 많아서 입원도 안 되었습니다.

멀어서 히로시마에서 매일 갈 수 없지,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작은 오두막집이 보였습니다.

아주머니 저 오두막을 빌려달라고 했더니 빌려주셨습니다.

거기에 가마니대기를 깔았더니, 아이와 시누이 그리고 나 세 사람이 충분히 잘 수 있었다.

그리고 차(車)·····그 때는 고무바퀴가 아니고 쇠바퀴여서 터덜터덜 터덜터덜 소리가 요란했다.

그것을 매일 빌려 가지고, 거기에 시누이를 태우고 병원으로 가고오곤 했습니다. 요즘은 쇠를 안에 넣고 봉합하지만, 그 때는 쇠를 밖에 대고 기브스를 하고 한 열흘 정도 지냈습니다. 기브스를 떼고 자기 혼자 설 수 있도록 되자, 히로시마의 방공호(시집이 있는 곳)로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시누이가「말랐다」고 하면서 어머니로부터 꾸중을 들었어요.

마르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할 수 없잖아요.

그러고 나서 또 니시하라의 어머니가 있는 곳 (친가)에 갔습니다.

시누이는 지금 마산(馬山)에서 원폭지부(原爆支部)를 맡고 있어요.


⑧帰国~도둑~마을 사람이 선장(船長)에게 感謝

니시하라(西原)의 어머니가 있는 곳에, 군대에 갔던 남편의 동생이 돌아왔는데, 「내일은 한국으로 갑니다. 아주머니」라고 말하기에····。

한국으로 돌아간 것은, 몇 사람이 배를 사서, 고히(己斐)의 서쪽에 있는 항구로부터 출발했습니다.

배가 출항했지만 파도가 거칠어, 뱃멀미를 하고 또 얼마나 더운지 고생이 심했습니다.

귀국은 20년의 10월····일본에서는 며칠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음력으로 15일었다는 것은 압니다. 한국의 추석이기 때문에 압니다.

15일에 떠난 것이 22일에야 도착했습니다. 꼬박 일주간 걸렸습니다.

부산에 도착하니 마아, 배 밖에서는 큰 소리로 떠들고 때리고····남편의 사촌 형이 내려와서 들어보니, 일본인은 나쁜 짓을 했다고 해서, 한국인이 때리고 짐을 빼앗고 했어요. 사촌 형이 그것을 말려, 「이 배의 일본인은 우리를 구해 주었으니, 일본인을 미워하지 말라 당신들도 이 배를 타고 가서 일본 사람에게 맞고 오라」고 하니 그 한국인도 사과하더군요.

····여기는 안 되、배를 대면 안 된다고 하여 친돈(?)이라고 하며, 남편이 태어났던 곳으로부터 20리쯤 되는 곳에 있는····거기에 배를 대고 내렸다.

시월이어서 거기서는 한창 나락을 베고 있었다. 논에 사람이 많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뛰어 와,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 일본에서 원폭을 맞고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하며····어쨌거나 그래서 우리들도 안심하고 풀 위에 손발을 뻗고 뒹굴기도 하고····그랬지요.

마을 사람이 선장(船長)에게,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40인 넘는 사람을 살려 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하고····그리고 모두가 여기서는 선물로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여, 한국의 담배를 하나 꺼내어 주기도 하고, 밥을 짓는 사람····배가 있기 때문에 술은 마시지 않겠다고 선장이 말하자, 회를 쳐서 먹도록 하는 사람·····거기는 생선이 많았다···한국의 밥을 먹는데 너무 많다고 선장이 깜짝 놀라며, 「너무 많으니 반쯤 덜어 주세요」····

사촌 형 되시는 분이 「일본은 쌀이 없으니까 시골까지 쌀 사러 가는 것이 곤란하지요. 쌀을 드릴 테니 모두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쌀을 선물로 ···」라고 하자, 모두가 큰 사람은 넉넉하게, 작은 사람은 조금씩 가지고 나와 모두 모이니 쌀이 두 말, 무거워서 두 사람이 그것을 메고 배에 실었지요. 그 때 주소를 적어 받았는데도 당시는 편지 연락이 안 되어서, 주소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 끝 -

姜 씨는 渡日治療者로서, 1999年 3月~5月, 広島共立病院。

한글도, 일본 문자도 「읽고 쓰기가 안 된다」고 하는 姜 씨의 記憶은 豊富하였습니다. 나는 두 번 불러서 녹음 청취를 의뢰했습니다.

테-프를 작동할 때는 일부의 자구(字句)의 짜 맞추기를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의 말과 그 의사(意思)의 충실한 재현을 기하였습니다.

               (청취: 이때모또 마모루 (井手本 護)


在韓被爆者의 姜씨

広島共立病院 6층 307호실은 4인 방이었다. 그의 대화 중에서「포우후라=ポウフラ」라고 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한국인 강 씨가 그 말을 알고 있는 데 대하여 깜짝 날랐습니다. 그로부터 이야기 꽃을 피었습니다.

姜 씨의 남편도 被爆者인데 위암, 여동생도 피폭으로 화상과 상처 그리고 암, 다른 형제 3인도 모두 암, 친척 중에 돌아가신 분 모두가 암이라고 말했습니다.

가까운 친척 되신 분이 암이라는 병명으로 타계하였고, 자기도 가와무라 병원(河村病院)에서 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투병생활은 언제까지 계속될는지요. (같은 병실에서· 高城 妙子)



 うつむいてオムツ代えながら

 そのまま家の下敷きに


韓国人被爆者(渡日治療)

姜 順 伊

(現住所)

大韓民國 釜山特別市沙下區槐亭洞 458-45


① 十歳で来日·山口県の山のなかへ

父は先に日本に来ていた。

いつ頃、こちらに来たのかはよう判らんけどね。

私は十歳の時、母と妹と弟と四人で日本に来た。

日本へ行けば何かいいことがありそうで、胸をふくらませて来た。

下関へお父さんが迎えに来ていて、ついて行ったらね、山々々々···ひどい田舎じゃったよね。

山と畑しか見えん、一日に人間を三人も見たら多いほどだった。

ほかの人はあっちの山で木を切りよっちゃった、お父さんはこっちの山で木を切りよっちゃった。

日本人から機械を借りて、木を切る仕事をして、毎日ナンボウずついうて金を貰いよったんょ。

(*移動製材…切り倒した材木を現地で加工して板にする仕事があった)

家は大きなのを借りて、毎月金を払っていた。

私らは淋しいよね。誰もおらんから…。

此処が日本か…いいよった。

遊びに行ったことはあるよ弁当持って、お父さんについて…山へね。

でも何にもすることがないにょ、弁当包んでお父さんについて行ったら、今度は一緒に帰るだけ……遊ぶ相手は誰もおらん。

山であっちこっち遊んで帰るだけ。さみしいよ。

淋しくて淋しくて、釜山に帰ろうよ言って、父母を困らせました。

言葉も判らんし……。弟や妹は学校へ行ったが、私は歳が多いから学校へも入れんし……その田舎には私の行く学校は無なかった。

とうとう学校へ行かれんかった。


②広島に来て~挺身隊のがれに結婚~

お父さんの親戚が広島に有って、それで十二歳のときに広島に来たんょ。

西原(現·安佐南区西原)に····

天満の工場近くの藪のところにいて、父と母は舟で太田川の砂や小石を集める仕事をして。

私は家にいた、妹や弟がいるから····

西原に四年いたら十六歳になった。

そのころ。みんなバンザイをしよっちゃった。毎月集まって····[昭和十六年十二月八日の対米英宣戦報告を記念し、翌年一月八日を第一回として以後毎月八日を大詔奉戴日と定め、国民の戦意高揚を図った)····私にはなんのことか判らん。

いつかの晩にお父さんがお母さんのところへ来て、二人とも泣いて話をしょっちゃった。

韓国の女で十五歳から十七歳までは挺身隊に出んにやあいけん言うて·····

それでお父さんとお母さんが何処ぞ見合いする人はないかと探して、結婚するいうことになった。

結婚していたら挺身隊に連れて行かんいうて····探していたら福島町の方の二十二歳の人がいてそれにきめだんよ·····。私はまだ十六よ。

私があんまり若いから、お父さんが

二十歳になったら連れて行くから言うて頼んだが、向うにお祖母さんというのがいて、いま連れて行く言う。

まあしようがない、挺身隊へ行くよりええから、いうて·····行った。

挺身隊言うたら工場じゃないよ!

兵隊さんのヨメになるのよ!

兵隊さんいっぱい並んで·······!韓国の娘連れてって········

兵隊さんヨメさんおらんでしょう、ほいじゃけ部屋へつれてって、一晩に四十人も三十人も·····。始めは仕事をする所へ連れていく言うても、本当はそれじゃあないのよ!

そうよねえ! 挺身隊へ行った人がいま生きていて、韓国にいるじゃないの!

(*姜さんが、急に、たたきつけるような激しい口調になった。録音をそのまま収録)


③出産~被爆~

主人は三菱の運転手で、トラックに乗って物質を運んでいまして。

十七のときに私も働きに出た……天満町へ行く橋を渡って左側のところに缶詰の缶を作る会社があった、そこへ勤めたんよ。

一年ちょっとで妊娠になって、会社を休んで五月二十七日に子がうまれた……会社からお土産(※お祝い)が沢山あったよ。米の粉やらオシメやら……産婆さんもいっぱいお土産をもって來たよ。

男の子が生まれたいうてね、記念日に男の子がうまれたいうてね。

(※海軍記念日·明治三十八年五月二十七日·日本海軍が日本海でロシア海軍に大勝)

産婆さんが名前も持って來たよ、カズヨシいうてね、お祖父さんお祖母さんがつけたのはアツヨシよ、この子は名前が二つよ。

誕生日を過ぎてね、また会社へ出る···わたしやあ会社に連れたことはなかったが、そのころは子供がおるからいつも五分·十分遅いよ、その朝も乳を飲まして、オシメをするときに家が潰れて下敷きになったの····、どうしてこんなになったのかわか判らん······、オシメしよったから子供の上にこんなにしてかがんどるでしょ、そもままいえの下敷きになって、埃も一杯落ちて、苦しくて大きな声も出されんし、ただ泣き寄ったら、外がこの位(親指大)明るう見えたよの·····そこで大きな声も出されんしのに助けてくれえいうてないたり、子供は子供でないたり、ワシはワシでないたり···

そしたら外で、誰か男の声で

「どこかあ―!」いうて、

「ここですよ―、助けて―!]いうたら

そのひとが何かもってねえ、この位の穴があいた、まあ頭位のねえ····


④ 二人の恩人

それは隣のタカラ(田原?)の小父さんだった。小父さんじゃないよ、旦那さんだよ、命の恩人だよ。

タカラの小父さんは日本人の人よ、屠場で働く人ですぐネキ(近く)におった。

(タカラの小父さんとその小母さんとは後の渡日治療のときに逢って一緒に食事することが出来た

それで助けられて外に出た····

近くの小学校へ行ったらはあ人が一杯で、「あんたの子供は血が出とるよ」いう、抱いている子から血が出る····それでも洗うところもないし····己斐駅へ行く橋のこちらに土手がある、そこへ行ったら火傷した人が沢山いた。

一寸元気な人は橋を渡って行きよった、私もついて行った、ついて行ったら己斐駅のたっちのところ····あれは小学校じゃろうよそこへ人が一杯集まっとった。

子供も私も·····まあ着ていたのは薄い着物一枚でしょ、それが潰れた家に引っ掛かったでしょ、ちぎれて破れて····子供のだってちぎれて破れて二人ともボロボロ、そしてこっちも血がでるあつこも血が出る····、それでも痛くもない、血がでたのも判らなかった····

ボロボロになって、子供を膝に抱いて小さくなって泣いとった

他の人は家族がいくらかいるけど私やあ子供とたった二人で、子供は泣くし私も泣くし·····だった。

子供を膝に抱いて、小さくなって座って泣いとった。そしたら、どこかの小母さんが来て、

「まう、子供も可哀相に、ま」言いよった。

奥さん、私が何か一つ持ってくるから此処へじっとしておりんさいよ、いうて何処かへ行った

私は何のことが判らなかった。

これを見て笑うのか思うたよ。

子供で、此処をこうやって隠しとるんじゃけえそれを見て笑うんか思うてねえ。

そうしたら小母さんがまた来てから「ふるいけどねぇ」いうて、浴衣を一枚渡してくれた。

私やあ泣いたよ、嬉しくってねえ。

子供を膝に小さくなっとったんだが、それで子供のと私のと、袖無しを両方取ったら、まだ帯がとれました。

帯もなんにも無かったんだから····その帯で子供もオンブして····その小母さんが、ウチの家はナンだからアソコへいこういうて、水の有るところへ連れて行って呉れて、血を抜いたり洗ったりしてくれて····その晩は小母さんもずっと其処に居てくれた。

その小母さんは韓国へ来る(*帰国)ときに挨拶に行ってね、それからは見られんのよ。

又日本へ来たからね、行ったら逢われんのよ、家もどこか判らんのよ。


⑤ 骨折りした小姑

その晩遅くに主人が小姑を連れてきた。

小姑は中学一年生(*今でいえば)だった、あの時学校の二階におったらしいのよね、二階から落ちて骨を折って····大きい骨じゃない小さい骨をね、骨が一寸出とった。

それで歩かれんから主人がオンブして来た。

主人は三菱へおったからね、怪我はちょっとしとっても火傷はしていなかった。

姑さんは反故(ホウグ)買いに出とった。丁度橋の下で何か洗っていたらしい。怪我一つ無かった。

主人が姑さんを探しに行ったが姑さんも私らを探しよった。

弟が独りおった、幼稚園へ行っとったがそれが居らん、何処へ行ったか思いよったら飛んで帰ってきた、弟は一つも怪我をしとらん。

お祖母さんは親戚へ行って、土手の陰にいたらしい、お祖母さんも怪我は無かった。

それで皆あつまって、防空壕へ行ったんよ、見たら中は一杯だからウチらは入らない、だからそのときは防空壕の横におってね。

そこへ怪我をした人をいっぱい積んだトラックが来てね、怪我した者は山奥のどこかの病院に連れていくからここへ乗れ言って····小姑は足を折っているでしょ、主人と小姑を積んで行った

私やあ其処におられんから西原のお母さんのところに行ったのよ。


⑥西原の父母のところ····

西原のお母さんの家も半分位くずれていて、お父さんが火傷をいっぱいして帰って来て、手当てしよちゃった。

お父さんは勤労奉仕へ行って火傷したんよね、短いのを着とるから·····長いのをきとった方がええんよね。

お母さんと妹と弟は藪の中へムシロを敷いて、そこに皆おっちゃった

それでも防空壕より良いからそこへ私も二晩くらいおった。

そこへ主人の弟が兵隊に行っているのが来た。

主人の弟は原爆が落ちたのも判らんし、一週間の休暇じゃいうて帰って来たんです。

広島に来て見たらもう、なんにも無い

どうしたんか思うて、びっくりして探したら防空壕で····とかいうてね。

その弟は西原から何かいっぱい持って行ったよ。

(*主人の弟と一緒に彼女も福島町へ帰った?


⑦小姑の世話に田舎の病院へ

家族を見る人は来い言うて、前に怪我人を積んで行ったトラックが又来た。

そのとき姑さんは····あの、綿で足袋を作る会社に糸が一杯あったって、その糸を皆がどんどんどんどん持っていきよったって····姑さんはあれを自分も貰って来るんじゃいうて、娘が怪我をしているところへ行かんのよ、仕方がないから私がトラックに乗って小姑のところへ行った。

小姑は怪我が足だから歩けない、息子もいるし、私がオンブすることも出来ない。

患者が多いから入院も出来ん。

遠いところなので広島から毎日は行かれないし、困っていたら小さな小屋が見えた。

小母ちゃんあの小屋を貸して下さ言うたら、貸して呉れた。

そこにムシロをしいたり、下げたりしたら息子と小姑と私の三人が十分寝られた。

それで車·····あの時はゴム輪でなくカネ輪だった、ガタガタガタガタいうのが付いとった。

あれを毎日借りて、それに小姑を積んで病院へ行ったり来たり·····今頃はカネを中に入れて縫うでしょ、あの時はカネを外に当ててギブスをしてそれで十日ぐらいもして、ギブスを取って自分が立てる位になって、広島の防空壕(嫁ぎ先)のところへつれて帰った。

そしてたらお母さんに(小姑が)「痩せた」言うて怒られた。

痩せるのは当たり前ようね、仕様がないよね。

それから又、西原のお母さんの所(実家)へ行った。

小姑は今馬山で原爆のあの、支部をしよるよ。


⑧帰国~泥棒~村人げ船長さんへ感謝

西原のお母さんの所へ、兵隊に出とった主人の弟が来てね。「明日は韓国へ行きますよ小母ちゃん」いうて····

韓国へ帰ったのはね、何人かで舟を買って、己斐の西の方の港から出発しました。

船出したものの海はひどく荒れ、船酔いと暑さのなかで大変でした。

帰国は二十年の十月····日本では何日か判からん、旧(暦)の十五日だったいうのは判る、韓国の盆だから判る。

十五日に出たのが二十二日に着いた

一週間掛った。

釜山に着いたら、まあ船の外で大きな声で、わめいたり叩いたり····主人の従兄弟の兄さんが下りて聞いたら、日本人は悪いことをしたからいうて、韓国人が叩いたり荷物を取ったりするんよ、従兄弟の兄さんがそれを捕まえて

「この船の日本人は私たちを助けてくれた、日本の人を憎むのなら貴方もこの船に乗って日本の人に殴られて来い」いうたらその韓国の人も謝った

····ここは駄目、船をつけたら駄目じゃいうてチンドン(?)いう、主人がうまれたところから二十里位のところにある····そこへ を着けて下りた。

十月だから其処では稲を刈りよっちゃった、田んぼに人がいっぱいいた、その内のひとりが飛んで来た。

そして話を聞いて、皆さん日本で原爆に遇うて大変だった言って····まあそれで私らも安心して草の上に手足を延ばして寝転がったり····ね。

村の人が船長さんにね、「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ありがとうがざいます、こんなに四十人すぎる人を助けてくれた、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いうて····そして皆が、此処ではお土産にあげるものが何もないいうて、韓国のタバコを一つ出す人、ご飯炊くひと·····船があるから酒は飲まないと船長さんが言ったが刺身をして食べさす人·····あそこは魚が多かった···韓国のご飯を食べるアレ、大きいでしょ、船長さんがびっくりして、「まあこりゃああんまり多いよ、半分にして」····

従兄弟の兄さんが、「日本は米がないから田舎まで買いにいくのが大変なんだ、上げて呉れるのなら皆がチョコチョコでもいいから米をお土産に····」いうたらね、皆がね、大きい人は余計持ってくる、こまい人は少し持ってくる、皆集めたらね、米が二斗, さげられんかったよ重くてね·····二人でね、それをさげて船にのせて····船はその晩に出ていったよ。あの時、住所を書いてもらったのだけど、そのころ手紙が行ったり来たり出来なかったでしょ、それで判らなくなってしまったのよ。(終わり

姜(カン)さんは渡日治療者で、九九年三月~五月、広島共立病院

ハングルも、日本の文字も「読み書き出来ません」といわれる姜(カン)さんの記憶は豊富でした。私は再度招かれて録音の取り直しを依頼されました。

テープ起こしに際しては一部の字句の組み替えも行いましたが、あくまでもご本人の言葉と、その意思の忠実な再現を期したつもりです。

                     (聞き取り·井手本 護

在韓被爆者の姜さん

広島共立病院六階307号室は四人部屋でした。その会話の中で「ポウフラ」という言葉がでました

韓国人の姜(カン)さんがその言葉をご存じなのにびっくり、それから話に花が咲きました

姜さんのご主人も被爆者で胃ガン、妹さんも被爆でヤケドと怪我そしてガン、他の兄弟三人もみなガン、身内の死者みなガンと言われました。

身近な方がガンという病名で他界され、自分も河村病院でガンと言われたそうです。

「アリガトウゴザイマス」と言っておられました。

闘病生活は何時まで続くのでしょう。

(同室にて·高城 妙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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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被爆者들의 經驗談[1]
  • 2017-08-14
  • 김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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