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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렙회

被爆 體驗과 歸國中의 遭難

  • 김학도
  • 조회 : 1335
  • 2017.08.21 오후 04:42

被爆 體驗歸國中遭難

 

                                                                                               김 학도 

 

다시 떠올리는 것도 말하기도 싫은 그 날과 歸國中의 일입니다. “九死一生이라는 말도 있지만, 제가 그 말대로 숱한 死線을 넘어 살아남은 자 중의 하나입니다. 그 죽음의 고비중의 하나가 원폭투하 때와 그 후 한국으로 오는 도중에 겪은 일입니다.

나의 안태고향(安胎故鄕)廣島縣 甲奴郡 田總村(現 總領町)입니다. 아주 깊은 山村입니다. 1930 年代初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이주해 오고, 반대로 한국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만주로 떠나던 때에 저의 부모님도 일본으로 건너가신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 형제 중에 맨 큰 아버지와 끝의 삼촌은 한국에 계시고 둘째와 셋째(저의 아버지)가 같이 일본에 건너가신 것입니다. 한국에서 농사짓던 분들이니, 역시 일본으로 건너 와서도 산촌으로 들어가 숯을 굽던가 일본인의 농가에서 농삿일을 도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제가 1997년에 원폭피해자 수첩을 받으러 히로시마 시청 원호과에 갔을 때에 월요일에 심문을 마치면 그 결과를 금요일에야 듣게 되니 그 동안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호텔에서 그냥 지날 수 없어서, 그 사이에 제가 태어난 곳을 찾아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첩첩 산중이었습니다. 지금은 발달해서 교통도 편리하고 의료시설도 있지만 그 당시는 병이 나도 진료 받을 곳도 없던 때였습니다. 그곳에 가서 한 일본인 노인을 만났습니다. 제가 태어난 집을 찾는 모습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열 다섯살 때로 기억한다고 하면서, 조선 사람이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데 여자 분이 뒤 따라 가면서 "아이고 아이고" 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노인을 보자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태어나 겨우 돌 지나서 저의 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친척(어머니의 삼촌)이 살고 있는 히로시마 시로 나와서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언제까지나 친척을 의지해서 지낼 수 없어서, 나를 데리고 재혼하여 히로시마의 구레()의 히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의 仲父님은 田總村에서 일찍 나와서 廣島市 南三蓧町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큰아버지(仲父)에게는 딸만 네 명이 있었습니다. 제가 여섯 살 때에 큰아버지가 남자인 나를 양가독자로 입양하려고 하여 의붓아버지 집에서 나를 데리고 히로시마로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큰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며 큰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살게 된 것입니다. 제가 오기 바로 전에 딸 하나가 질병으로 죽고, 남은 가족은 모두 여섯이었는데, 제가 온지 삼년 후 아들이 태어나서 모두 일곱 명 가족이었습니다. 큰아버지는 장사를 하셔서 비교적 어렵지 않게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원폭 투하 당시 나는 열세 살, 三蓧國民學校 6 학년이었습니다. 운명의 팔월 초엿새는 오전 0시 이십오분 공습경보가 발령이 나고 2시 십분에 경보가 해제되었습니다. 수면이 부족한 상태로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아침에는 구름 한점 없이 맑은 날씨에 더운 아침이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출발할 즈음에 다시 경계경보의 사이렌이 울렸기 때문에 학교에 갈까 말까 머뭇거리고 있는 때에 이웃의 친구 니시애 아리모또(西江有基)(한국 이름 배 재문=경산 박사동이 그의 고향임)군이 와서 함께 학교에 갔으나, 지각이었습니다. 아침마다 朝禮를 하는데, 지각이었기 때문에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쪽 뒷문으로 들어가 교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복도에는 고등과 상급생이 주번 완장을 하고 지나는 것을 보고 마음을 조리며 책상에 앉아 있었읍니다. 키가 큰 친구의 자리는 뒤쪽이었고, 내 자리는 조금 앞의 창가 쪽이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번쩍눈이 부실 듯한 섬광이 지나고 이어 엄청 큰 굉음이 났습니다. 그 순간,“, 폭탄이다하는 직감에, 방공 훈련할 때처럼 양손으로 눈과 귀를 막고 입을 벌리고 책상 밑에 엎드렸습니다. 시간이 얼마가 지났는지 모릅니다(1,2분 정도). 마냥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주위는 깜깜해지고 벌써 학교 앞쪽의 집들에는 불이 나서 마치 한밤중의 화재처럼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의 교실이 2층이 아니고 1층이었습니다. 운동장 쪽(二宮金次郞 동상 근처)이었습니다. “니시애(西江), 뛰자!”하고 둘이서 창문을 뛰어넘었습니다. 학교 앞 집들이 불타는 그 불빛으로 운동장에 서 있던 아이들이 울음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분산하여 가는 모습은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서쪽 뒷문 쪽으로 가서 보았습니다. 공습 때 南三蓧町 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아서 곧바로 밖으로 나와 집을 향해 달렸습니다. 시외 전찻길(藝備線) 건널목을 넘어 미타키(三滝) 육군병원 앞에서 왼쪽 대나무 숲길을 지나고, 철교 밑을 지나서 아키(安藝)여학교까지 오니, 학교 교사가 길쪽으로 무너져서 멀리 밭길로 돌아서 오는데, 그 무렵에 새벽에 날이 새듯이 주위의 사물이나 사람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두운 길을 어떻게 하여 거기까지 달려 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뒤에 따라오던 친구(西江 )가 자신의 얼굴을 봐달라고 하기에 돌아보니, 이마에 유리 파편이 박혀서 온 얼굴에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도 어딘가 다친 데 없는가 생각했지만, 나는 어떤 상처도 없었습니다. 단지 오른쪽 어깨가 뭔가 굵은 몽둥이 같은 것으로 맞은 듯한 통증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집에 가까이 다가오니 西江 군의 삼촌이 나에게 너의 가족은 강가 뚝 쪽으로 갔다고 일러 주셨습니다. 뚝 쪽에는 아버지(仲父)가 작은 채소밭을 일궈놓고 거기에 작은 판잣집을 짓고 언제든지 위급한 상황이면 그 곳에서 (가족이 흩어졌을 때에 거기에) 모이도록 하였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그쪽으로 달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약속한 대로 거기에서 가족과 만났는데, 그 안에 들어가자마자 곧 의식을 잃어버렸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지 못하나 의식이 돌아와 깨어보니 소낙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금방 내가 학교에 가서 교실에 앉아 있었는데... 생각하면서 문득 옆을 돌아 보았습니다. 누군가 누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인사불성이 되어 있던 사이에 아버지가 거기에 돌아온 것입니다. 입은 옷은 타고 몸의 피부는 벗어져 너덜너덜하고 허리띠를 찼던 곳만 두고 온 몸이 탔습니다.

그날 아버지는 신텐치(新天地) 爆心地에 아주 가까운 곳)로 볼 일이 있어서 가던 도중에 직접 피폭된 것입니다. 오후 4시경 코이(己斐)국민학교에서 임시응급진료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웃의 아는 사람이 듣고 와서, 들것을 만들어 태우고 갔지만 너무 많은 환자가 모였기 때문에, 환자를 둘 곳이 없어서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그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3시경에 사망하셨습니다. 그날 (87) 오후 코이 국민학교 교정(校庭)에서 화장한 후 유골을 갖고 가족이 오두막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仲母)B29가 지나니, 이마에 손을 얹고 쳐다 보면서 무엇이 반짝 반짝 비취며 떨어지고 있다라고 말하는 순간 피폭된 것입니다. 햇빛을 가리우느라고 오른손을 올렸기 때문에 적삼이 올라가 오른쪽 옆구리가 길게 데었었습니다. 오랫동안 잘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한국에 와서 그 해 연말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소위 태내피해자(胎內避害者)입니다. 자랄 때는 별로 이상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이 30 이전에 위아래 치아(齒牙)가 다 빠지고, 내장을 수술하고 지금도 살아 있지만 건강이 좋지 않는 셈입니다. 어머니는 한국에 와서 9년 동안 가슴의 통증과 호흡 곤란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사촌 동생도 어릴 때 피폭하고 성장하면서 양쪽 무릎 관절이 아프고 가슴의 통증과 혈담을 뱉곤 했는데, 결국 열아홉 살에 사망했습니다.

원폭 투하 후 가족의 시신을 찾아 여기저기의 빈터에서 화장을 하느라 그 연기와 시신이 타는 냄새가 바람에 날려와 그 냄새를 맞게 되니 역겨워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가마니로 덮어놓은 시신들, 파리떼가 새까맣게 붙어 있는 모양 정말 보기가 싫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한동안은 시체를 보는 것도 시체가 탈 때 그 연기와 냄새를 맡는 것이 괴로웠지만 나중에는 점점 태연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후쿠시마쵸() 도로가애 있는 집에서 죽을 배급하고 있었으므로, 받아먹은 일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날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열흘 정도 지나서 다니던 미사사 국민 학교에 가서 봤습니다. 정문은 닫혀 있고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밖에서 안을 보니, 학교 교사(校舍)는 불타 없어지고 기초 돌만 남았는데 황량한 광장 그대로였습니다.

37년 만에 히로시마에 갔을 때 모교 미사사 소학교에 들러서 그 당시 교장님으로부터 학교의 창립 100주년기 책을 받았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폭풍으로 교사가 쓰러지면서 불이 붙어 탔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교사(校舍)가 쓰러지기 바로 직전에 창문으로 뛰어 나온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목조 교사에 깔려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요코가와역(橫川驛) 앞까지 가서 시내를 보니, 콘크리트만 군데군데 남아 있고 집 같은 모양은 전혀 보이지 않고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훤히 보이는 황량한 공터였습니다.

9월 초순이 되자, 어른들 즉 동향인과 아는 사람이 모여 귀국을 위한 의논들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소위 야미 배가 결정되어 히로시마 구레() ()에서 출항하였습니다. 첫날 밤은 키타 큐슈(北九州)의 어느 항구에 정박하여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그곳을 떠나서 가는데 아주 사나운 폭풍우 때문에 도중에 오시마(大島)라고 하는 섬에 겨우 도착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착장에 정박된 배와 배가 서로 부딪쳐서 내가 탄 배는 옆의 배보다 작고 낮았기 때문에 부닥칠 때마다 배의 위 부분이 부서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쪽 배에서 배가 맞닿을 때 그 배로 옮겨 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사람이 그 쪽 배에로 올라타기에 나도 그 배로 옮겨 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는 선착장에서 떠나서 섬 해안 가까이 붙어 나가다가 멈췄습니다. 그러자 섬에서 건장한 사람들이 나와서 굵은 밧줄을 던져 배에 묶게 하고, 파도에 따라 밀려 나가지 않도록 해 준 것입니다. 그렇지만 밤이 되어서 주위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파도에 의해서 배가 섬 쪽으로 기울어질 때 사람들이 배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뛰었지만 난간에 다리의 정강이 걸쳐서 앞으로 꼬꾸라졌습니다. 그나마도 앞으로 길바닥쪽으로 떨어지고 뒤로 바다 쪽으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밧줄을 신사(神社) 앞에 서 있는 도리이(鳥居)의 기둥에 감아서 붙잡고 있는데, 어린 저에게 너는 이제 살았으니 이 줄을 잡아라고 해서, 그 줄을 잡고 있었습니다. 배가 파도에 밀려 밧줄을 끌어당길 때에 토리이 (鳥居)의 기둥이 기울어져 위에 걸쳐진 돌이 떨어지면서 거기에 붙었던 무엇이 제 허리를 친 것입니다. 위에 걸쳐 있던 돌이 제 머리에 맞지 않으므로 죽음은 면한 것입니다. 마침 일본인의 집에 부축을 받아 들어가 기대어 앉아서 밤을 새웠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폭풍도 그치고 파도도 조용해졌습니다. 선착장 쪽을 보니 본래 내가 타고 온 배는 계속해서 발동기를 걸어 그 자리에 그대로 선착장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 배에서 사람들이 내리는 것을 보고 다가가서 가족을 만나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른 배를 교섭하여 올 때까지 그 오시마 섬에서 약 한달 가까이 머물었습니다. 그 동안 나는 허리가 몹시 아프고 정강이도 통통 부어 운신(運身)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새로 교섭하여 온 다른 배를 타고 츠시마(對馬島)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자고, 츠시마에서 부산으로 향해 오는데, 1시간 정도 후에는 부산에 도착한다며 모두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배의 기관이 멈추는 것입니다. 기관이 고장 나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쳐보려고 애를 써도 안 되는 모양이었습니다. 선장은 일본인이고 기관장이 한국인이었는데, 기관장이 기계가 고장이 나는 줄도 모르고 화투를 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밤낮 3일을 배가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암초에 부딪쳐 배에 구멍이 나면 이불로 틀어막고, 낮이면 멀리 보이는 배를 손짓하며 소리 지르고, 무인도 섬 옆을 지날 때는 어떤 젊은 사람은 배 위의 판자를 가지고 뛰어내려 섬을 향해 헤엄쳐 가고, 밤이 되면 와이셔츠를 벗어 횃불을 만들어 흔들면서 살려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럭저럭 흘러 마산보다 훨씬 더 멀리 떠내려간 것입니다. 파도가 산처럼 쳐다보이고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데 어떤 부인은 하늘을 향해 손을 모으고 비비며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흘째 된 어느 날 밤, 구조선이 다가와 그 배에 탄 사람이 몇 명이며, 짐은 얼마나 되는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더 큰 배가 와서 우리의 조난선을 끌고 섬 쪽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사흘 동안 지난 뒤 다시 그 구조선이 조난선을 끌고 여러 시간 걸려서, 새벽에 구마산(舊馬山)에 도착하여 상륙했습니다. 그리고 14년 후 내가 육군 군의병과(軍醫兵科)를 받고 마산 군의학교(軍醫學校)에서 교육을 받을 때, 일부러 상륙한 그 곳에 가서 보았습니다. 상륙할 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감개무량(感慨無量)했습니다.

제가 원폭을 맞았음에도 지금까지 살아 있고 건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어째서 원폭의 피해를 입지 않았는지 말하라면, 아마도 저는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첫째 직사광선의 열선을 피하여 교실에 앉아 있었기 때문었습니다. 그 날 지각을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살아나게 된 요인입니다. 무엇보다도 원폭피해를 입지 않은 첫째 요건은 그늘진 곳에 음폐하여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폭풍에 의한 피해입니다. 폭풍으로 인하여 건물이 무너지고 사물이 날으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다치고 상처를 입습니다. 그런데 저는 대밭사이로 지나오면서 용케도 그 폭풍을 피한 것 같습니다. 셋째로 비를 맞지 않아야 하는데 저는 그 비를 피했습니다. 넷째로 고열화재를 피하여야 합니다. 다섯째 폭발할 때 주위에 퍼진 핵분열 생성물이나 오염된 것을 만지거나 흡입하게 되면 안되는데 피하여야 합니다. 중성자가 시신을 발굴한다든지 하면서 벽돌을 치우거나 무너진 목재들을 들어내면서 거기에서 입을 수 있는 피해를 피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저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김학도

2017-08-23 00:14

지금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덤으로 사는 인생 바르게 살려고 힘쓰고 있습니다.후회없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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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被爆 體驗과 歸國中의 遭難
  • 2017-08-21
  • 김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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