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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렙회

[韓日併合] 百年을 맞아

  • 김학도
  • 조회 : 1236
  • 2017.08.22 오후 01:23



* 이 글은 現 KJ-Club 회장이신 省庵 申 鉉夏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일본어로 된 [(韓日倂合)百年に当たって)]를 번역하여 본 게시판에 올립니다. 눈에 잘 띄게 하려고 漢字를 그대로 쓴 것에 양해를 구합니다. 酷毒, 惡辣했던 日帝 强占期 35年을 다시 한 번 살펴보십시다. 이 글은 日帝 强占期 35年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의식을 올바로 가질 때 나를 알고 또 삶의 방향을 바로 잡고 나갈 수 있습니다.


 [韓日併合] 百年에 즈음하여

  省庵 申 鉉夏

    前 敎授

「韓日併合條約」締結의経緯

2010年은 [韓日併合] 百年에 해당하는 해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朝鮮]은, 建國以来 中華思想을 높여 스스로를 [小中華]로 自足하고, 오래 동안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지나고 있었다. 게다가 오로지 封建主義와 儒敎思想을 神主처럼 받들고 變化와 改革을 거부하여 왔다.

地球 反對側의 西欧諸國은、18世紀부터 市民革命에 의하여 共和制 國家를 形成하고 産業革命으로 富國強兵을 이루었다.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이들 列強은、資源의 確保와 商品의 輸出을 위한 植民地가 必要했던 것이다. 저들은 武力의 힘으로, 弱小國家를 侵略하여 領土를 擴張하는 帝國主義에 의하여, 아시아, 아프리카, 南美大陸으로 植民地 爭奪戰을 거듭 버려나갔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西欧의 文物을 일찌감치 도입했던 일본은 富國强兵을 이루는 西欧列強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帝國主義의 班列에 오르게 되었다.

日本帝國이 植民地 領土確保를 目的으로, 가장 먼저 눈여겨 점찍은 곳은 바다를 사이에 둔 이웃 朝鮮이었다. 1875(明治8)年、日本은、軍艦 雲揚을 앞세우고 朝鮮을 위협하고, 江華島條約(朝日修好條約)을 締結하고, 侵略의 발판을 구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朝鮮의 指導層은 19世紀、西勢東進하는 巨大한 해일(津波) 속에서 世界潮流의 큰 흐름을 깨닫지 못하고, 變化와 内部改革을 無視한 채 나라의 門戸를 굳게 잠거 놓고서, 政権維持와 民衆의 収奪에만 餘念이 없었던 것이다.

이때에 各地에서 貪官汚吏와 民衆의 収奪로 塗炭에 빠졌던 民衆이 民乱을 일으키자, 朝鮮政府는 이것을 鎭壓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淸國의 軍隊를 불러들인 것이다. 여기에 日本은 淸國보다 훨씬 많은 軍隊를 朝鮮에 派遣하여 서울을 掌握한 後、淸國軍을 攻撃하여 淸日(日淸)戦争(1894~96)을 惹起시켰다.

西欧列強의 豫想에 反하여 清日戦争은 日本의 勝利로 끝났다. 清日戦争의 勝利로 日本은 清國의 勢力을 朝鮮으로부터 追出하는 데 成功하였다. 그러나 清日戦争을 눈여겨보고 있던 러시아가 牽制하러 나선 것이다. 日本은 러시아를 中心으로 한 프랑스, 독일 등의 三國의 干渉으로, 清日戦争에서 얻은 遼東半島를 되돌려 주게 되었다.

한편 朝鮮政府가 日本의 侵略을 阻止하기 위하여 러시아 勢力을 끌어들이려고 하니, 日本은 그 동안 朝鮮에서 確保한 地位마저 없어지게 될 것을 우려하여, 明成皇后(朝鮮 第二十六代王 高宗의 妃, 閔妃)를 弑害할 乙未事變(1895)을 일으킨 것이다. 이에 따라 高宗이 러시아公館에 身邊의 保護를 위하여 俄館播遷(注1)을 하니, 日本은 러시아와 協商을 通해 事態의 収拾을 꾀했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러시아가 義和團事件(注2)으로 満州를 占領하자, 1903年、日本은 러시아에 朝鮮을 保護國으로 할 것을 인정하도록 하였다. 러시아가 이것을 거절하자 日本은 러시아와의 戦争을 決定하고, 1904年、中立을 宣言한 朝鮮에 大規模의 軍隊를 派遣하여 漢城(現서울)을 占領하였다. 日本 占領軍의 壓力에 屈한 朝鮮政府는, 이 해의 2月 23日, 國権을 빼앗길 단서가 되는 [韓日議定書]에 調印한 것이다.

清日戦争에 이어 露日戦争에서도 日本이 勝利하였다. 日本은 美國이 仲裁한 포츠머스 條約(注3)에서 러시아에 朝鮮에 대한 日本의 支配를 認定하도록 하였다. 露日戦争 後、日本은 美國하고도 [桂·타프트密約]을 맺었다(注4). 그 密約의 骨子는, [日本은 美國의 필리핀 支配를 認定하는 대신, 미국은 日本의 韓國支配를 承認한다] 고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韓國侵略을 위한 對外 整地作業을 마친 日本은, 곧바로 天皇의 特使 伊藤博文을 漢城으로 派遣하여, 武力을 앞세운 威壓과 懐柔로써 1905年 11月, 韓國의 外交権을 剥奪하는 [第2次 韓日協約인 乙巳保護條約을 締結하게 된다. 여기에 激憤한 全國 各地에서 義兵運動이 일어나는 가운데, 高宗은 이 條約이 強制에 의한 것으로서 效力이 없다고 하는 親書를 各國 元首에게 보낸 것이다.

朝鮮統監(注5) 伊藤博文은, 1907年, 화란의 헤이그 平和會議(注6)에 特使를 派遣한 것에 대한 責任을 물어 高宗의 退位를 強要하고, 大韓民國 軍隊를 解散시켰다. 이것과 同時에 [韓日新協約]인 丁未 七條約을 強制的으로 締結하고 韓國 内政까지도 掌中에 넣게 된 것이다. 侵略의 元兇 伊藤博文은, 1909年 10月 26日, 愛國 義士 安重根에 의하여 満州(現中國東北三省) 하얼빈 駅頭에서 射殺 당했다.

이미 韓日議定書、韓日協約 (第1次 韓日協約)、乙巳條約(第2次 韓日協約)、韓日新協約(乙未 七條約)등, 4次의 强壓的 條約으로써 國権은 송두리째 잃어 버렸다.

그 와중에 1910年 8月 22日, 大韓帝國 内閣総理大臣 李完用과 朝鮮統監 寺内正毅와의 사이에 八個條의 [韓日併合條約]이 締結되어, 一週間 後의 8月 29日에 公布되었다. 이로 인하여 1392年 7月 17日, 太祖 李成桂가 建國하여 27代의 王이 519年 継承하여 온 [朝鮮王朝]는 純宗(第27代 王)4年(庚戌年)8月 29日, 日本에 強要 당한 [韓日併合]으로서 결국 그 幕을 내렸다.

朝鮮王朝의 滅亡에 對하여는, 過去 先進 文明을 전해준 이웃 나라를 顚覆시켜버린 日本帝國主義는 물론 본래부터였으며, 世界의 흐름을 全혀 읽지 못한 朝鮮 支配層의 無知와 無能, 그리고 백성을 하늘처럼 받들지 않고 스스로 内部改革을 이루지 못한 채, 勢道政治만을 꾀한 賣官賣職과 不正腐敗로써 民生을 塗炭에 빠뜨려버린, 朝鮮王朝와 支配層 士大夫에 각각 무거운 責任이 있다.

[注1] 俄館播遷: 1895年(明治28年)8月 20日、朝鮮 第26代 高宗의 妃 [明成皇后]가 弑害 당한 乙未事變이 일어나자, 그 후 日本軍의 無慈悲한 攻撃에 身邊의 危険을 느낀 高宗과 王世子는 1897年 2月 25日부터 1898年 2月 11日까지, 俄館(漢城에 設置된 러시아 <俄羅斯>公使館)에 難을 避하여 있었던 것을 말한다.

[注2] 義和團事件: 淸國末期의 1900年, 中國山東省에서 일어난 反基督教 暴動을 契機로 華北 一帶에 퍼진 反帝國主義 農民闘争. 北清事變 또는 団匪의 亂이라고 한다.

  義和団은 白蓮教의 一派라고 稱하는 宗教的 秘密結社로, 當時의 社會矛盾, 基督敎 布敎, 독일의 進出 등에 反感을 품고, [扶淸滅洋]을 외치면서 武力的인 排外運動을 展開하였다. 1899年, 山東省 西部에서 暴動을 일으켜, 外國人 特히 基督敎 教徒를 迫害하였으나, 清朝에서도 이것을 扇動해 暴動을 擴大시켰다. 1900年에는 北京까지 쳐들어가 官軍과 더불어 英國公使舘을 攻撃하였으나, 영국·러시아·독일·프랑스·미국·이태리·오스트레일리아 ·日本 등 8개國 連合軍에 撃破되었다.

   1901年 9月, 北京 議定書(辛丑條約)의 成立으로 事件은 마무리됐지만 엄청난 배상금 지불을 포함한 12개 항의 내용은, 독립국의 체면을 失墜시키는 동시에 中國의 植民地化를 보다 促進시키는 結果를 가져왔다.

[注3] 포츠머스 條約(Treaty of Portsmouth): 日露戦争終結에 즈음하여 日本과 러시아 사이에 맺어진 講和条約이다. 루-즈벨트(T. Roosevelt) 大統領의 斡旋에 의하여 1905年 8月 10日부터 美國의 軍港 포츠마우스(Portsmouth)에서 講和会議가 열렸다. 全権委員으로 日本側은 小村寿太郎와 高平小五郎,러·시아側은 S.윗태와 R.R.로-젠. 樺太 (사할린) 割譲과 賠償의 問題를 둘러사고 交渉은 難航하여, 日本側이 賠償金의 要求를 撤回한 結果,同 9月 5日 講和가 成立했다. 그 주된 内容은, (1) 日本이 朝鮮에 있어서 指導,保護,監理를 행할 権利를 가질 것, (2) 両国이 満州로부터 撤兵할 것, (3) 関東州 租借地와 長春-旅順間의 鉄道를 日本에 譲渡할 것, (4)北緯 50° 以南의 樺太를 日本에 割譲할 것,(5) 日本海,오ー츠구海,베ー링그海의 러시아 沿岸 漁業権을 日本에 부여할 것 등이었다. 日本 国内에서는 賠償金과 領土獲得을 期待하는 소리가 강하여, 講和条約에 不満한 民衆은 日比谷 火攻(焼打ち) 事件등의 行動을 일으켰다. (譯者 注)

[注4] 桂-타프트(Taft)協定 : 1905年 (明治38)7月 29日、東京에서 美國과 日本 사이에 교환한 朝鮮(大韓帝国) 및 필리핀에 關한 秘密覚書를 말한다. 同年 7月,필리핀을 視察하고 돌아가는 중 일본에 들린 美國 大統領 特使 陸軍長官 윌리엄 하워드 타흐트(William Howard Taft)가 桂太郎 總理와 会談을 하고 両者는 다음과 같은 覚書를 確認했다.

(1)日本은 美國의 필리핀 統治를 承認한다.

(2)極東平和를 위해 日本,美國,英國 3国間에 好意있는 了解를 必要로 한다.

(3)美國은 韓国에 대한 日本의 優越的 支配를 承認한다.

이 秘密覚書는 그 後, T. 루ー즈베르트 大統領에 의하여 追認되었다. (譯者 注)

[注5] 朝鮮統監: 朝鮮統監은 統監部의 首長이다. 統監部는 日本帝國이 乙未條約을 締結한 後 漢城府에 設置한 官廳으로, 韓國統監部 또는 朝鮮統監部라고도 稱한다.

  伊藤博文은 1906年부터 1909年까지 初代統監이었으며, 寺内正毅은 1910年 三代 朝鮮統監을 거쳐 1916(大正5)年까지 初代 朝鮮総督이었다.

 [注6] 헤이그 平和會議: 1899年과 1907年, 러시아皇帝 니코라이 二世의 發議에 의하여 화란의 헤이그에서 열린 2回의 國際會議를 가리킨다. 이 會議는 平和確保 의 方法을 研究할 것을 優先으로 하는 目的으로 한 것으로서, 그 名稱을 平和會議라고 이름 한 것이다.

  高宗은 第2回 會議에 3人의 特使를 蜜派시켜 國情을 呼訴하려고 했으나, 日本帝國의 執拗한 妨害로 初志를 貫徹하지 못했다. 密使의 한 사람인 李儁은, 平和會議長에게 高宗의 親書와 信任狀을 提出하고 現場에서 殉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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