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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렙회

어머님이 그리워질 때엔

  • 김학도
  • 조회 : 4989
  • 2017.12.18 오후 06:30

                         어머님이 그리워질 때엔



 

   이 글은 현 KJ-Club(한일 교휴회) 회장이신 신현하 선생님이 그의 후배(대구 사법학교) 에 대하여 일본어로 기록한 것을 제가 우리 말로 번역하였습니다.

 省菴 申鉉夏

 前 大学教授 

 綠風會 會員        

 飜譯: 金學道

                            http://blog.daum.net/harto

   거센 파도가 소용돌이 치는 현해탄(玄海灘)은 한(조선) 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해상 교통의 요로(要路) 에 있다. 유사이래 한·일 양국 사람들은 이 바다를 건너가고 건너오며, 문물 교류를 하는 한편 서로 국익을 얻기 위하여 겨루어왔다. 해방(종전)전 이 현해탄에는 한국의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연결하는 부관연락선이 운행되고 있었지만, 해방 후 자연스럽게 그것이 폐지됐다.

   한·일 관계사를 기록하는 노트 역의 "현해탄", 한·일 관계의 산 증인이었던 "부관 연락선"에는 눈물 없이는 말할 수 없는 애화가 많이 숨겨져 있다. 여기에 기록하는 전 육군 병장 李在建(본래 일본인으로서(이름은 히로하타 가즈또(広畑一人), 그의 기구한 인생도 그 비화 중 하나이다.


   일본에서 태어난 히로하타는 석공이었던 아버지를 따라서 현해탄을 건너 한국으로 오게 됐다. 부모님과 형제 넷 여섯 식구였지만, 1940(소화 15년) 부산에서 지병을 앓던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직업관계로 대구로 옮긴 그는 1944년 시내 본정(本町) 국민(초등)학교에서 대구 사범학교 심상과로 옮겨 와 나와 동문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상급생인 나와는 개인적 친분이 없이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던 1945년 6월, 새로운 일터를 발견한 히로하타의 아버지는 두 동생들과 함께 함경남도 함흥시(현 북한)로 이사를 했다. 그 때 마침 형은 출정(出征) 중이어서, 혼자 남겨졌던 히로하타는 함흥 사범학교로 전학을 하도록 담임선생에게 말했지만, 공교롭게도 기말시험 중이어서 상담을 받은 담임 T 교사로부터는, "지금은 시험 중이니까, 여름 방학까지 기다릴 수 없겠니?"라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 그의 앞에는 불운이 닥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여름 방학이 되어, 전학수속을 마치고 기뻐, 용기를 내어 함흥에 가려고 하는 참인데,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조선) 반도는 점령군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며, 정치 경제 치안 상태는 혼란의 극에 달했고 사상의 대립 투쟁은 나날이 심해져 갔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겨우 중학 2학년의 히로하타에게는 급변하는 정세를 제대로 판단할 엄두도 못 가지며, 어찌할 대책도 없었다. 그럭저럭 하는 중에 일본인의 본국송환이 시작되면서, 주위에서는 일본으로 건너가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함흥에 있는 가족들이 대구에 들렀다가 같이 돌아가게 될 것으로 믿고 기다렸던 것이다.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한 달, 두 달 그리고 3 년, 4 년이란 세월이 지나 마침내 12 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 동안, 기구한 운명에 농락된 것이다.

   함흥에 있던 히로하타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남북 분단 때문에 대구로 올 길이 막혀버렸다. 1년 가까이 소련군에 억류된 끝에 1946년 7월 함경남도 원산항에서 직접 일본 마이즈루항으로 철수하게 됐다. 주위를 둘러싼 한국인들은 해방의 기쁨에 취해 있었지만 그에게는 지옥을 헤매는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가족들의 소식을 찾아 분주히 헤맸지만 어디로 가도 소식을 들을 곳도 막막하기만 했고, 하는 것이나 이루고자 하는 것 모두 허사로 끝났다. 마음이 강했던 그는, 어리면서도 용기를 내어 "가족들과 다시 만나는 날까지는 어찌해서든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굳은 마음으로 그 날이 올 때까지 참아낼 결심을 했다.

   얼마 안 되는 몸에 지닌 돈은 금세 고갈되었다. 계절은 어느덧 가을도 끝나고 혹독한 겨울을 알리는 팔공산(대구시 북쪽에 솟은 팔공산)에서 내리 부는 찬바람은 몸도 마음에도 사정없이 스며드는 것이었다. 히로하타는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래 가지고는 가망이 없다. 우선 의식주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부끄러움도 체면도 무릅쓰고 오늘부터는 구걸하기 위해 도시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오랜 만에 어머니의 영정을 앞에 두고 "제발 내려 주세요"하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날부터 히로하타는 식당 뒷문에 버리려고 하는 잔반(殘飯)을 찾아다니며, 민가의 문 앞에서 식사나 헌 옷을 구걸했다. 때로는 마비(痲痺)가 오는 마음을 채찍질 해가며, 동물과 같은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연명하려고 발버둥 치며 허덕였다. 대구 시내에서는 얼굴 아는 사람의 눈에 띄었고, 게다가 집집마다 대문이 삼엄하게, 문단속도 잘되어 있었기 때문에, 히로하타에게는 문지방이 높게 느껴졌다. [그렇다. 구걸과 기거는 인정미가 있는 시골에서 하고 가족들의 소식을 물을 때만 시내 거리에 나서기로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그는 당시 아직 반농촌(半農村)이었던 시교외(市郊外)의 "무태"마을(현 대구시 북구 일대)을 임시 생활 근거지로 하기로 했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한 일이지만 그 때의 생각이 때에 적절하게 맞아 목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떤 농가의 외양간의 구석을 잠자리로 하고, 걸식한 찬밥으로 굶주림과 추위를 견뎠다. 자존심 등은 진작에 내팽개쳐 버렸다.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생활이었지만 그런 생활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고 오늘은 죽으리라."하고 히로하타는 몇 번이나 마음먹었는지 모른다. 초췌한 얼굴은 때 투성이가 되어 볼품이 없고, 누더기를 걸친 영양실조의 몸은 사람의 자식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꼴이 심했다. 그도 마침내 힘이 다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고열에 떨면서, 꿈속에서 "어머니"를 계속 부르짖고 있었다.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다"라는 말이 있지만, 심신이 약해진 히로하타를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내 준 은인이 있었다. 자비로운 양어머니 우 순필 여사이다. "아아, 이제 정신이 드나? 자 이 백탕을 마시고 기운을 내야지 그러지 않으면…". 겨우 제 정신이 돌아온, 그는 따뜻한 온돌(온돌)방에 뉘어져 있었고, 흰 무명 치마ㆍ저고리(한국 전통의 여성복)의 낯선 부인이 부드럽게 손발을 주물러 주고 있었다. 당시〈무태>에는 헛간이나 외양간을 거지에게 쓰도록 하는 느긋한 인정미가 있는 농가가 많았다. 평소 별로 개의치 않은 청년이 고열로 신음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우 여사가 가족들을 설득해서 집 안으로 들여놓은 것이다.

   제 정신이 든 히로하타의 손을 잡고 우 여사는 상냥하게 그간에 있었던 사정을 물었다. [일본어로 “お母さん(어머니)”이라고 소리치는 것을 보면, 당신은 일본인이 틀림없지만, 무슨 사정인지 자세히 얘기하지 않겠니?". 우 여사의 온정에 마음이 풀린 히로하타는 얼어붙었던 마음을 열었다. 그의 신상 이야기를 들은 우 여사는 집안의 가족과 상담한 끝에, 자기들과의 동거를 권했다. "당신의 가족을 만날 때까지 이 집에서 함께 살아라. 다행이 우리 집에는 사내아이들도 있고, 함께 지내면 외롭지도 않을 테니까". 오랫동안 어머니 정에 굶주렸던 그는 우르르 "어머니(オモニ)"하며, 그 무릎에 엎어져 하염없이 울었다. 우 여사의 따뜻한 손은 언제까지나 그의 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도량이 넓은 우 여사의 주선으로 거지같았던 히로하타 카즈토는 李가의 양자로서 따뜻하게 영입됐다. 이름도 아들들의 항렬(行列)(혈족의 방계에 대한 세수관계를 나타내는 말, 형제 관계는 이름의 한 글자가 공통어가 됨)에 맞추어 동렬의 글씨 "在" 자를 넣은 "在建"이라고 지어졌다. 인간다운 생활로 돌아온 재건(在建)은 의형제들과도 금방 친해졌다. "조선어" 실력도 눈에 띄게 향상했고, 양가(養家)의 가족들과의 의사소통에도 불편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 사회에서 양가 일족의 이들의 조치가 주위 사람들에게 선뜻 순조롭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그 때문에 양가(養家)의 李씨 일가는 주변으로부터 소원(疏遠)해지는 것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히로하타가 양가(養家)에 들어가던 당시의 사회정세는 전반에 걸쳐서 아직 혼란한 상태였다. 더욱이 당시는 반일감정(反日感情)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일본인인 그에 대한 주위로부터의 백안시(白眼視), 양가내(養家內)에서 새로운 인간관계 구축, 생활습관이 다른 환경에 적응하는 데는 남모르는 고난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거기에 처음 겪는 농사일이나 소치기 등 그것들에 순응하기까지는 심신(心身)이 입은 고통은 필설(筆舌)로 다하기 힘든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와 만났던 때에 그는 그것들에 대하여 여러 말 하려고 하지 않았고, 나도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 중에서도 히로하타는 사실 가족들의 소식을 찾고, 일본의 원적지에 편지를 냈지만 결과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아버지들은 잘 도착했을까. 일본의 본적지에는 왜 아무 소식도 없지. 본적지에서 좋은 소식이 없다는 것은 아버지들도 일본에 귀국하지 못했다는 것 아닌가”라고 같은 것을 아무리 생각해 봤지만, 아무런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李씨네 양자로 있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라고 완전히 포기해 버릴 무렵, 그 지긋지긋한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1953년(소화 28년) 8월 13일, 거주지에서 현지징집된 그는 육군 신병 훈련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훈련소에서의 성적이 우수했던 李在建은, 많은 신병 중에서 특수 부대원으로 선발되어, 미국에서 받는 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은 숨기고 있을 생각이었는데, 그가 일본인이라는 것은 부대 내에 어렴풋이 알려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스럽던 그는 최종 심사에 입회한 부대장 Y대령에게 자신의 신상을 소상히 털어놓았다. 온후한 성품으로 인간미 넘치는 Y대령의 특별 배려로 미국행의 특수 부대원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그는 부대장 운전병으로 발탁되어 전속으로 근무했다.

   이재건의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되자 당연히 군관계기관에서 조사가 실시됐다. 한국군 정보기관들은, “혹시 옛 일본군이 스파이로 잠입시킨 것은 아닌가”하는 혐의가 걸려심문을 받게 되었다. 1954년 7월 초 먼저 호적 등본 제출을 요구 받았다. 대처(對處)에 고심한 그의 양부모는 당시의 모든 상황 추이를 감안하여 부실 입적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허위의 출생 신고를 동 사무소에 제출하고 자신들의 둘째 아들로 입적시키고 등재된 호적 등본을 당국에 제출했다.

   군 정보기관에서의 조사는, 오래 동안 엄밀하게 진행되었다. 다행히 주위의 증언과 본인의 진술서, 거기에 Y대령이 힘써 준 덕에, 李在建에 걸린 간첩 혐의가 풀렸다. 그 후에도 그는 한국군의 한 사람으로서 복무하게 되지만 아직도 기약 없는 편지를 본적지에 보냈다. “제발 나의 가족을 찾아 주세요”라고 피를 말리는 듯한 심정으로 수십 통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문구도 꽉 막혀, “지금 쓰는 편지도, 천분의 일밖에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라고 항상 틀에 박힌 진부한 표현이었다.

   1957(昭和 22)년 3월 초하루,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일본의 본적지 사무실 등에서 힘을 써준 덕에 일본의 가족들과 연락이 된 것이다. 훗날 후쿠오카에서 만난 李재건, 즉 히로하타 가즈또는 “그 때의 감격! 혼자서 펑펑 울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런데 드디어 귀국 절차를 시작하는데, 거기에는 뜻밖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적(軍籍)에서 제적(除籍), 호적에서 제적을 위한 재판 등 넘어야 할 고개가 몇 개가 있었다.

   우선 軍籍에서 제적을 신청했다.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군 당국도 수속 절차의 진행 방식의 합의에 대하여 고심했다. 육군 본부에 대하여 李재건은 신상을 상세하게 진술하여 선처해 주도록 청원했다. 많은 군 관계자도 그의 처지를 동정하고 인도적 특례로서 제적을 인정받았다. 1957년 4월 9일 육군 참모 총장 李亨根 대장의 명의로 국방부 장관(방위대신) 앞으로 제적 확인의 공문이 송부되었다.

"일본인으로서 군 복무 중이던 하기(下記) 兵士에 대한 병적 제적을 시달하였음을 보고한다".

 

    군번 947899

    계급 병장

    이름 李在建

   다음으로 호적에서 제적 수속이 시작되었다. 양부(養父) 이성희가 원고가 되고, 양자 李재건(히로하타 카즈또)과 양모(養母) 우순필을 피고로 하여 "친자관계부존재확인(親子關係不存在確認)"을 법원에 청구한 것이다. 이 청구재판에 종사한 재판관들도 인도적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1957년 7월 12일, "주문(主文) 李재건(히로하타 카즈또)이 원고인 그의 아버지와 또 한 사람의 피고인 양모(養母)의 사이에서 출생한 차남이 아님을 확인한다" 라는 판결에서 제적 청구가 인정된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인 "李在建"은 일본인 "히로하타 카즈또"로 되돌아간 것이다.

   12년이라고 하는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살아온 양가의 가족들, 특히 사랑으로 돌보아 준 양어머니와의 이별은, 형용하기 어려운 깊은 슬픔이었다. 어머니(우순필 여사)는 눈물을 참고, 『재건아! 어머니가 죽기 전에 만날 수 있을까 』하며, 언제까지나 아들(히로하타)의 손을 놓지 않았다. 히로하타 카즈또(한국명 李재건)은 동문지(同門誌)에 실린 글에서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리운 옛 고향, 사랑하는 부모 형제들과 헤어지고 또 하나의 고향, 사랑하는 부모 형제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 때의 복잡한 심정을 나 밖에 누가 알 수 있으랴. 1957년 9월 15일 일본의 고베항에 상륙하면서 조국에 첫발을 디딘 때의 감격!『 아, 살아 있어서 좋았다 』라고 눈물, 눈물로 가족들과의 대면을 실현한 것이었다".


   원래의 고국으로 돌아온 히로하타는 "1964(昭和 39)년에 돌아가신 양부(養父)의 성묘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 1 년에 두 번씩 대구의 "집"에 갑니다. 나는 한국과 일본 두 조국이 있습니다. 히로하타 가즈또, 李재건은 낳아 준 일본의 어머니와 가장 힘들 때 돌봐준 한국의 어머니, 두 어머니가 있습니다. 일본의 어머니는 돌아가셨으므로, 앞으로는 한국의 어머니를 소중히 여기고 지낼 생각입니다"라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과거에 관해서는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고, 자신에게 주어졌던 불우한 운명을 종용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울타리에 핀 노란 개나리, 봄의 산을 감싸는 활짝 핀 진달래, 팔공산을 화려하게 장식 하는 가을의 단풍, 어디까지나 한없이 맑고 푸른 하늘 등 어머니의 나라의 풍경을 잊을 수 없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대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경부선(서울과 부산을 잇는 철도)의 열차의 기적 소리가 들리면 개울 바닥에 소를 놓고 금호강(대구시 북쪽을 흐르는 강)의 강둑에 뛰어올라가 먼 남쪽으로 달리는 기차를 바라보며, 귀국을 꿈꾸고 울었던 날들을 회고했다.

   1971(쇼와 46년 봄, 후쿠오카에 주재하던 나는 히로하타의 수기가 실린 동문지(同門誌)를 펴 보고 그야말로 깜짝 놀라 앙천(仰天)했다. 어떻게 화제의 인물 본인이 같은 시내에 살고 있지 않은가! 바로 "등불 밑이 어둡다"는 말 그대로였다.

   후쿠오카 시내 천신(天神)에서 처음 대면한 그는 나에 대해서 후배로서의 예의를 표하고, 자신의 직장까지 안내하였다. 희귀한 보석 감정사의 자격을 취득한 그는, 후쿠오카시 천신(天神) 지하상가에 아늑한 점포를 차리고 있었다. 당시 그를 둘러싼 분위기는 나에게는 아주 행복하게 비췄고 충실한 것으로 느껴졌다.

   가끔 만나면 그는 한국 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한국의 군가와 흘러간 옛 노래를 그리운 듯이 불렀다. 그가 가장 좋아하고 부른 것은 6.25전쟁이 한창일 때 유행한 『비 내리는 고모령』이었다. “어머니가 그리운 때는 나도 모르게 이 노래가 입에서 저절로 나옵니다.” 하고, 노래방 마이크를 움켜쥐고, 유창한 한국어로 이야기하면서 불렀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

   부엉새도 울었다오나도 울었소

   가락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오던 그 날 밤이 그리웁고나

   1974(昭和 49)년,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후는 연하장 등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돈독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0(平成 2)년 6월 10일,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 히로하타 가즈또는 언젠가 問病 차 들렀던 후쿠오카의 H병원에서 유명을 달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인(死因)의 병명은 전에 들었던 대로 위암이었다. 사후(死後)의 병상(病床)의 머리맡에는 두 사람의 어머니의 사진과 한국의 유행가집이 남아 있던 것으로 전해 듣고 가슴 뜨거워지는 심정으로 그를 추모하였다.

   후쿠오카에서 히로하타의 장례식은 제2의 고향 대구에서 온 의형제들이 참석하였고, 어머니의 슬픔을 영전에 고했다.

"어머니는 산사(山寺)에 들어가, 재건의 죽음을 애도하며 명복을 빌고 있습니다."하고.

  『비 내리는 고모령』어머니를 그리워하는 李재건, 히로하타 가즈또의 노래 소리는 언제까지나 현해탄에서 메아리칠 것이다. □



          お母さんが恋しい時は

        省菴 申鉉夏

元 大学教授 

綠風會 會員

荒波逆巻く玄海灘は、韓(朝鮮)半島と日本列島を結ぶ海上交通の要路である。有史以来、韓·日両国人は、この海を渡ってしげく往き來し、文物交流のかたわら国益を競い合って来た。解放(終戦)前、この玄海灘には、韓国の釜山と日本の下関を結ぶ関釜連絡船が運行されていたが、解放後は自ずとそれが廃止された。

韓·日関係史を記すノート役の「玄海灘」、韓·日関係の生き証人だった「関釜連絡船」には、涙なくしては語られぬ哀話が数多く秘められている。ここへ記す元韓国陸軍兵長李在建こと、日本人広畑一人の数奇な人生も、その秘話のうちの一つである。

逆巻く(さかまく)-- 파도가 흐름을 거슬러 소용돌이치다

げんかいなだ[玄海灘·玄界灘] --현해탄

しげく往き來しーー빈번히, 뻔질나게 왕래한

かたわら[傍ら] [명사] 곁; 옆; 가. [부사] …함과 동시에; (…하는) 한편.

きそいあう[競い合う] 서로 지지 않으려고 경쟁하다; 서로 힘쓰다.

あいわ[哀話] [명사] 애화; 슬프고 가엾은 이야기.

いきしょうにん[生き証人] [명사] 산 증인.

しんそうは長ながいこと秘ひめられていた 진상은 오랫동안 숨겨져 있었다。

すうき[数奇] 기구; 불우(不遇).(→すき(数奇)、数奇な人生も기구한 인생도

 

日本で生まれた広畑は、石工だった父親に連れられて玄海灘を渡り、韓国に移り住むことになった。両親と兄弟四人の六人家族だったが、1940(昭和15)年、釜山で病気の母親を亡くした。その後、父親の仕事関係で大邱に移った彼は、1944年、市内の本町国民(小)学校から大邱師範学校尋常科に進み、同門のよしみを結ぶことになった。だが、上級生の私とは、個人的な付き合いのないまま解放を迎える。

解放が目の前に来ていた1945年 6月、新たな仕事場を見つけた広畑の父親は、二人の弟とともに咸鏡南道咸興市(現北朝鮮)に引っ越した。ちょうと兄が出征中なので、一人取り残されていた彼は、咸興師範學校への転校を擔任に申し出た。あいにく期末試驗の最中で、相談を受けた担任のT教諭からは、「今は試験中だから、夏休みまで待ってくれんか」という返事が返って来た。すでにこの時点で、彼の前には不運が押し迫っていたけれど、神ならぬ身には知る由もなかった。


いしく[石工] [명사] 석공; 석수.(=石屋)

せっこう[石工] [명사] 석공; 석수.(=石屋·いしく)

よしみ[好しみ·誼] [명사] 친분; 정의(情誼); 인연.

つきあい[付き合い·交際] [명사] 교제함; 교제상의 의리.

取り残されて (일부를) 남겨두다; 떼 놓다; 처지게 하다.

あいにく[生憎] 공교로운 모양; 형편이 나쁘게 된 모양: 공교롭게(도); (때)마침;

きまつ[期末] [명사] 기말.(↔期首

すでに[既に·已に] [부사] 이미; 벌써; 이전에.(↔いまだに)

おしせまる[押し迫る] 절박하다; 박두하다; 다가오다.

由(よし)もなく反対する (표제어:よし) 까닭도 없이 반대하다    

夏休みに入り転校手続きを終え、喜び勇んで咸興へ向かおうとしていた矢先、日本は連合国に無条件降伏をした。まさに靑天霹靂のような出来事である。韓(朝鮮)半島は、占領軍により南北に分断され、政治、経済、治安状態は混乱の極に達し、思想の対立闘争は日々激化して行った。何をどうすればよいのか。たった中学二年生の広畑に、激変する情勢をまともに判断する術など、持ち合わせていようはずがない。そうこうするうち、日本人の本國送還が始まり、周りから日本への渡航を勧められたが、咸興にいる家族たちが大邱に立ち寄り、一緒に帰れるものと信じて待った。首を長くして待つこと一ヶ月、二ヶ月、そして三年、四年と歳月が過ぎ、とうとう十二年もの長い間、数奇な運命にもてあそばれることになる。


やさき[矢先] [명사] 화살촉.(=やじり)

화살이 날아오는 전면(前面).(=やおもて)

화살의 목표. ....하려는 참

せいてん へきれき[靑天霹靂] [명사] 청천벽력.

まともに (진지하게 . まともにくらす[真面に暮らす] 착실[성실]하게 살다.

まともにぶつかる 정면으로 충돌하다.

じゅつ[術] [명사]기술; 기예; 재주; 수. 수단; 방법. 계략; 계책; 꾀.

そう斯こうするうちに (표제어:そうこう) 이럭저럭하는 동안에

本国ほんごく.

そうかん[送還] [명사] 송환.

とこう[渡航][명사] 도항.

たちよる[立(ち)寄る] 다가서다.

(지나는 길에) 들르다.[가능형]たちよ-れる[하1단 자동사]

咸興にいた広畑の父親たちは、南北分断のため大邱行きの途が閉ざされた。1年近くソ連軍に抑留された末、1946年7月、咸鏡南道元山港から直接、日本の舞鶴港に引き揚げることになった。周囲を取り巻く韓国人たちは、解放の喜びに酔いしれていたけれど、彼には地獄をさ迷う生活が持ち受けていた。朝から晩まで家族たちの消息を求めて奔走したが、どこへ行っても埒の明くはずがなく、やること成すことすべてが徒勞に終わった。気の強かった彼は、幼いながら勇気を奮い立たせ、「家族たちと再會する日までは、どうしても生きていなければ」、とその日の来るまで耐え抜く決心をした。

抑留 よくりゅう[명사] 억류.

まいづるこう[舞鶴港]

ひきあげる[引(き)揚げる] 철수[퇴각]하다. 귀환[귀국]하다; 돌아오다.

とりまく[取(り)巻く] 둘러[에워]싸다. (이익이 있을 만한 사람에게) 들러붙어 그 비위를 맞추다; 빌붙다.[가능형]...

よいしれる[酔いしれる·酔い痴れる] 술에 취해 정신을 잃다; 고주망태가 되다.

전하여, 도취되다; 황홀해지다.

さまよう[さまよう·さ迷う·彷徨う] 헤매다; 방황[유랑]하다; 떠돌다. 주저하다.

しょうそく[消息] [명사] 소식. (=たより·知らせ)

ほんそう[奔走] [명사] (일이 잘 되도록) 분주하게 뛰어다님; 또, 여러 가지로 애씀.

らち[埒] [명사] 사물의 단락·구분·한계. (마장(馬場)·목장의) 울타리.

徒勞 とろう; むだ骨折(ぼねおり)[명사] 無駄骨むだぼねを折おるだけでなんのかいもないこと.

いくらもなかった手持ち金は、見る見る内に底をついてしまった。季節はいつの間にか秋も終わり、厳しい冬を告げる八公山(大邱市の北方に聳える八公山)下ろしは、身にも心にも容赦なく染み渡った。広畑は次第に焦り出した。「これではもう後がない。まず衣食住の問題から解決しなければ。そのためには恥も外聞も顧みず、今日からは物乞いに街へ出よう」と心に決めた。するとなぜか気が楽になったように思えた。久し振りに母の遺影を前にし、「どうか授けて下さい」と心ひそかに祈った。

手持ち金 てもちかね [명사] 현재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 용돈 

みるみる[見る見る] [부사] 보고 있는 동안에; 순식간에.

しみわたる[染み渡る] 스며들어 번지다[퍼지다].

焦り出した あせり[焦り] [명사] 초조해함.

あとがない[後がない] 물러설 데가 없다; 절망적이다.

いしょくじゅう[衣食住] [명사] 의식주.

がいぶん[外聞] [명사] 외문; 세상 소문; 평판; 또, 그 결과로서의 체면.(=うわさ)

かえりみる[顧みる] 돌아보다. 뒤돌아보다. 회고하다; 돌이켜보다.

物乞ものごいする.(→빌어먹다) 2.(기원) 祈いのる.

久し振りに ひさしい[久しい] [형용사]오래다; 오래간만이다; 오래되다.

遺影 いえい [명사] 유영; 고인의 진영(眞影).

さずける[授ける]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주다; 하사하다; 내려 주다.


その日から広畑は、食堂の裏口で殘飯をあさり、民家の門前で食事や古着を乞うた。時には麻痺しようとする心に鞭打ち、動物に等しい食べ物で飢えをしのぎつつ、生き延びようともがきあえいだ。大邱市內では顔見知りが目に付いたし、それに家々の門構えが物々しく、戶締りも堅固だったので、広畑には敷居が高く感じられた。「そうだ。物乞いと寝起きは人情味のある田舎でやり、家族たちの消息を訊ねる時だけ街に出ることにしょう」、ということに考えが及んだ。いろいろ思案した末彼は、当時まだ半農村だった市郊外の「무태 ムテ」村(現大邱市北歐一帶)を選び、仮の生活根據地とすることにした。後になってつくづく思ったことだが、その時の思い付きは当てを得ていた。


殘飯 (ざんぱん.)잔반

あさり[漁り] [명사](구하기 위해) 찾아다님. 고기잡이; 조개잡이.

こう[請う·乞う] 청하다. 구걸하다.

麻痺 まひ[명사] 마비. 運動機能や感覚が失われること。痺れて感覚が無くなること。

機能や働きが停止すること。

むちうち[むち打ち·鞭打ち][명사] 채찍질함.

うえ[飢え·餓え] [명사] 굶주림; 허기.(=ひもじさ)

うえをしのぐ (표제어:うえ) 굶주림을 견디어 내다

もがき[踠き] [명사] 발버둥이침; 초조해함; 안달.

あえぐ[喘ぐ] 헐떡이다; 숨차하다. 괴로워하다; 허덕이다.

もんがまえ[門構え] [명사] 대문을 세움; 또, 그 구조.

ものものしい[物々しい] [형용사] 위엄이 있다; 어마어마하다; 장엄하다; 삼엄하다. (=いかめしい)

戶締り 문단속 戸こ. と |しまり[締(ま)り] [명사]느슨하지 않고 꼭 죄어 있음.

감독; 단속.

けんご[堅固] [명사] 견고. 건강함; 튼튼함.

しきい[敷居·閾] [명사] 문턱; 문지방; 하인방(下引枋).(=しきみ)(↔鴨居)

にんじょうみ[人情味] [명사] 인정미.

たずねる[尋ねる·訊ねる·質ねる] [타동사] 찾다. (소재·발자취를) 더듬어 찾다.

こうがい[郊外] [명사] 교외.

かり[仮] [명사] 임시; 일시적.(→かりに)

진(眞)·친(親)…이 아님; 가짜.(=にせ)

根據(こんきょ) 本拠ほんきょ; よりどころ;

つくづく[熟·熟熟] [부사] 곰곰이.(=よくよく) 눈여겨; 뚫어지게; 지그시.(=じっと)

마음속 깊이 느끼는 모양: 정말; 아주; 절실히.(=しみじみ·しんから)

あて[当て] [명사]댐; 닿게 함; 또, 댄 것. 목표; 기대; 전망. 방법; 수단; 길.

える[得る] [하1단 타동사] 얻다; 획득하다; 손에 넣다; 자기 것으로 하다. 이해하다; 깨닫다.


とある農家の牛小屋の片隅を寝床に、乞食した冷や飯で飢えと寒さをしのいだ。自尊心などとうにかなぐり捨てた、それこそ人間以下の生活だったが、そのような生活にも自ずと限界があった。「もう我慢出来ない、今日は死ぬんだ」、と広畑は何度心に決めたか分からなかった。憔悴した顔は垢にまみれて見る影もなく、ぼろをまとった栄養失調の体は、人の子とは思えぬくらい酷いありさまだった。さすがの彼もついに力尽きて倒れ、高熱にうなされつつ、夢の中で「お母さん」を叫びつづけた。

「地獄で仏に巡り合う」という言葉があるが、心身ともに弱り切っていた広畑を、死のどん底から救い上げてくれた恩人がいた。慈悲深い養母の禹順必女史である。「ああ、気が付いたかね。さあ、このお白湯を飲んで元気を出さなくちゃ」。やっとわれに返って見ると、彼は温かいオンドル(温突)部屋に寝かされ、白い木綿のチマㆍジョゴリ(韓国伝統の女性服)の見知らぬ婦人が、優しく手足を揉んでくれていた。当時〈ムテ>には、納屋や牛小屋を物乞いにつかわせてやる、大らかな人情味のある農家が多かった。日頃あまり気にも止めなかった若者が、高熱でうめいているのに気付いた禹女史が、家族たちを説得して家の中に運び入れたのである。

乞食こじき [명사] 거지; 비렁뱅이; 또, 비럭질; 구걸.(=物もらい·おこも)、

ほいと[乞食] 음 재생 [아어(雅語)·방언]거지; 비렁뱅이.

とうに[疾うに] [연어] 벌써; 이미.(=とっくに)(→とう(疾う))

かなぐりすてる[かなぐり捨てる] 홱 벗어 던지다; 벗어 팽개치다.

とうにかなぐり捨てた 진작에 내팽개쳤다.

それこそ [연어] 화제의 핵심이 되는 곳을 가리키는 말: 그야말로. 그것이 바로. 정말.

しょうすい[憔悴] [명사] 초췌. [형용사] 憔悴しょうすいしている; やつれている.

まみれる[塗れる] 투성이가 되다. [문어형][하2단]まみ-る

みるかげもない[見る影もない] [연어] (지난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볼품없다; 처참하다; 초라하다.

ぼろをまとう[襤褸をまとう] 누더기를 걸치다.

まとう[纏う、絡う] 출처: Wiktionary 着る。巻き付く。絡まる。

さすが[遉·流石] [부사][ダナノ]그렇다고는 하나; 뭐라고 해도; 역시; 정말이지.과연.

자타가 공인할 정도의; 그(처럼) 대단한.

うなされる[魘される] 가위 눌리다. [문어형][하2단]うなさ-る

はくとう[白湯] [명사] 백탕; 아무것도 섞지 않고 끓인 물.(=しらゆ·さゆ)

さゆ[白湯] [명사] 백탕; 백비탕(白沸湯).

しらゆ[白湯][명사] 맹탕으로 끓인 물; 백비탕.(=さゆ)

やっと [부사]겨우; 가까스로; 간신히; 고작.(=かろうじて·ようやく)

われ[われ·我·吾] [대명사] 나; 자신(문어(文語)의 1인칭 대명사).

もめん[木綿] [명사] 무명(실); 면직물.

もむ[揉む] [5단활용 타동사] 비비다. 문질러 비비대다. 구기다.

ひごろ[日ごろ·日頃] [명사] 평소; 평상시; 늘.

なや[納屋] [명사] 헛간.(=ものおき)

ものごい[物ごい·物乞い] [명사] 구걸; 비럭질. 거지; 비렁뱅이.(=こじき)

うめく[呻く] 신음하다.

おおらかな性格せいかく (표제어:おおらか) 느긋하고 대범한 성격

大おおらかな心こころの持主もちぬし 너글너글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

大おおらかに見みえる (표제어:おおらか) 너그럽게 보이다


正気づいた広畑の手を取り、禹女史は優しく事の次第を問うた。「日本語で"お母さん"と叫んでいるのを見ると、あなたは日本人に間違いないようだが、どういう事情なのか詳しく話してくれない」。禹女史の温情に気を許した広畑は、凍てついていた心を開いた。彼の身の上話を聞いた禹女史は、一家相談の末自分たちとの同居を勧めた。「あなたの家族がみつかるまでは、この家で一緒にくらしなさい。幸うちには息子たちもいるし、一緒に過ごせば寂しくもなかろうから」。長らく母情に飢えていた彼は、どっと「オモニ(お母さん)」の膝に泣きくずれた。禹女史の優しい手は、いつまでも彼の背中を擦り続けていた。

度量の広い禹女史の計らいで、物乞い同然だった広畑一人は、李家の養子として暖かく迎え入れられた。名前も息子たちの行列(血族の傍系に対する世數關係を表す語、兄弟関係は名前の一字が共通語となる)に合わせて、同列の字「在」を入れた 「在建」とつけられた。人間らしい生活に戻った在建は、義兄弟たちともすぐに仲良くなった。「朝鮮語」の実力もめきめきと上達し、養家族たちとの意思疎通にも不自由しなくなった。だが、当時の韓国社会において、養家一族のこれらの計らいが、周囲にすんなり受け入れられるはずがない。そのため養家の李氏一家は、周囲からの疎遠に耐えざるを得なかった。

しょうきづく[正気付く] (실신한 사람이) 제정신이 들다; 정신을 차리다.

きをゆるす[気を許す] 상대를 믿고 경계심을 풀다; 방심하다.

いてつく[凍て付く] 얼어붙다.(=凍りつく)

こする[擦る] かすり[掠り·擦り] [명사] 문지르다; 비비다. 문지르다; 비비다.

はからい[計らい] [명사] 조치; 처리; 재량; 처분. 주선; 알선.

どうぜん[同然] 동연; 서로 같음; 다름없음.

ぼうけい[傍系] [명사] 방계.(↔直系·正系)

めきめき[부사] 두드러지게 성장[진보]하는 모양: 눈에 띄게; 두드러지게; 무럭무럭;

すんなり [부사] 날씬하고 매끈한 모양: 날씬하게; 매끈하게; 나긋나긋하게.

일이 저항 없이 잘 되는 모양: 척척; 순조롭게; 쉽게. 순진한 모양.

そのはず[其の筈] [연어] 당연함.


広畑が養家に入った当時の社会情勢は、全般にわたっていまだ混乱状態だった。ましてや当時は、反日感情が極に達していた時期でもある。つらつらおもんみるに、日本人である彼に対する周囲からの白眼視、養家内での新たな人間関係の構築、生活習慣の異なる環境に慣れるまでには、人知れぬ苦難がなかったといえば嘘であろう。それに初めて経験する農作業や牛飼いなど、それらに順応するまでに心身の被った苦痛は、筆舌に尽しがたいものがあったであろう。だが、私と出逢った時の彼は、それらに対し多くを語ろうとしなかったし、私も敢えて聞こうとしなかった。

そんな中でも広畑は、実の家族たちの消息を探し求め、日本の本籍地に手紙を出し続けたが、結果はなしのつぶてだった。「父親たちは無事帰国したんだろうか。日本の本籍地からはなぜ何の知らせもないんだろう。本籍地から好いしらせがないということは、父親たちも日本へは帰れ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はないか」、と同じことをいくら繰り返し考えたところで、何の役にも立ちそうになかった。「これじゃ永遠に李家の養子でいるしかない」、とすっかり諦めきっていた頃、あの忌まわしい6.25 韓国戦争が勃發した。1953年(昭和28)年 8月13日、居住地で現地徵集された彼は、陸軍の新兵訓練所に入所することになる。


全般ぜんぱん  [명사] 전반.

いまだ[未だ] [부사] 아직; 이때까지(예스러운 말씨).(=まだ)

ましてや[況してや] [부사] 더구나; 하물며; 황차(況且).(=なおさら) 

きょくに達たっする (표제어:きょく) 극에 달하다

つらつら[熟] [부사] 곰곰이; 잘; 유심히.(=つくづく·よくよく)

おもんみる[惟る·以る] [아어(雅語)]생각해 보다.

白眼視 (はくがんし)[명사] 백안시.

こうちく[構築] [명사] 구축; 축조.

こうむる[被る·蒙る] 받다. 입다

ひつぜつ[筆舌] [명사] 필설(예스러운 말씨).

つくす[尽(く)す] 다하다. 있는 대로 다하다. (남을 위해) 애쓰다; 진력하다.

あえて[敢えて] [부사] 감히; 굳이; 억지로. 구태여; 그다지; 그리; 결코.

なしのつぶて[梨の礫] 편지를 내도 회답이 없음; 감감 (무)소식(‘梨’를 ‘無し’에 엇걸어서

忌(い)まわしい [형용사] 꺼림칙하다; 불길하다; 사위스럽다

勃発(ぼっぱつ)勃發발발

居住地 きょじゅうち [명사] 거주지.

徴集 ちょうしゅう.

訓練所での成績が優秀だった李在建は、多くの新兵の中から特殊部隊員に選ばれ、アメリカでの訓練に参加することになった。だが、自分では隠しているつもりだったけれど、彼が日本人であるということは、部隊内にうすうすしれわたっていた。どうすべきか戸惑っていた彼は、最終審査に立ち会った部隊長Y大領(一佐)に、自分の身の上を詳細に打ち明けた。溫厚で人間味溢れるY大領の特別配慮で、アメリカ行きの特殊部隊員から外された彼は、部隊長専属の運転兵に拔擢され転属となった。

李在建の日本人であることが公然となるや、当然ながら軍関係機関での調査が行われた。韓国軍情報機関からは、「もしかして旧日本軍が、スパイとして潜入させたのではなかろうか」、という嫌疑が掛けられ訊問が行われた。1954年7月上旬、先ず戸籍謄本の提出が求められた。対処に苦慮した彼の養父母は、当時のあらゆる状況推移からかんがみ、不實入籍が最善の策だと判断した。彼らは虛位の出生届を役場に提出し、自分たちの二男として入籍させ、登載済みの戸籍謄本を当局に提出した。 

軍情報機關での調査は、長い時間厳密に進められた。幸い周囲の證言と本人の陳述書、それにY大領の盡力などで、李在建にかけられたスパイ容疑が晴れた。その後も彼は、韓國軍の一人として服務することになるが、なおも当てのない手紙を本籍地におくりつづけた。「どうか私の身内を探して下さい」と血のにじむような思いで何十通も書き送った。手紙の文句も行き詰まっていて、「今書いている手紙み、千分の一しか希望が持てません」、といつも型にはまった決まり文句だった。

ゆきづまる[行き詰(ま)る] 막다르다; (앞이) 막히다; 전하여, 정돈 상태에 빠지다.


1957(昭和22)年3月1日、それこそ夢のような出来事が起きた。日本の本籍地役場などの盡力で、日本の家族たちとの連絡が取れたのである。後日福岡で出会った李在建こと、広畑一人は、「その時の感激!一人で男泣きに泣いた」と述懷している。ところが、いよいよ帰国手続きを始めると、そこには予期せぬ難問が待ち受けていた。軍籍からの除籍、戸籍からの除籍のための裁判など、越えねばならぬ峠がいくつもあった。

おとこなきになく[男泣きに泣く] 사나이 격정에 못이겨 울다.

おとこなき[男泣き] [명사] (좀처럼 울지 않을) 남자가 복받쳐 우는 울음.

述懷 [명사] じゅっかい. 술회

いよいよ[愈·愈愈·弥弥] [부사] 점점; 더욱더.(=ますます)

드디어; 결국.(=とうとう·ついに)、확실히; 정말.(=確かに·本当に)


まず軍籍からの除籍を申請した。前代未聞の出来事だったので、軍当局も手続きの進め方の合意に苦慮した。陸軍本部に出向かいた李在建は、身の上を詳細に陳述し善処を願い出た。多くの軍関係者も彼の境遇に同情し、人道的特例として除籍が認められた。1957年4月9日、韓国陸軍参謀総長李亨根大將の名義で、国防部長官(防衛代臣)宛に除籍確認の公文が送られる。

「日本人として軍に服務中だった下記兵士に対する兵籍除籍を示達したことを報告します」。

軍番 947899

階級 兵長

氏名 李在建

次に戸籍からの除籍手続きが始められた。養父李性熙が原告となり、養子李在建(弘田一人)と養母禹順必を被告として、「親子關係不存在確認」を法院(裁判所)に請求した。この請求裁判に携わった裁判官たちも、人道的な配慮を惜しまなかった。1957年7月12日k,「主文李在建(広畑一人)が原告の彼の父ともう一人の被告である母との間に出生した二男でないことを確認する」、という判決で除籍請求が認められた。ここに韓国人「李在建」は、日本人「広畑一人」に戻れたのであった。

12年もの長い間、いっしょに暮して来た養家の家族たち、特に愛で育んでくれた養母との別れは、形容しがたい深い悲しみであった。オモニ(禹順必女史)は涙をこらえ、『ジュウコンよ!オモニの死ぬ前にまた会えるだろうか』といい、いつまでも息子(広畑)の手を放そうとしなかった。広畑一人(韓国名:李在建)は、同門誌に載せられた手記で、当時の心境を次のように記している。「懐かしい古里、愛する父母兄弟たちと別れ、もう一つの古里、愛する父母兄弟たちに会いに行くのである。その時の錯綜した心境を、私の外に誰が知り得るであろう。1957年9月15日、日本の神戸港に上陸し、祖国に第一歩を踏み入れたときの感激!『ああ、いきていてよかった』、と涙、涙で、家族たちとの対面を実現したのであった」。


しんきょう[心境] [명사] 심경.(=心持ち)

元来の祖国に帰った広畑は、「1964(昭和39)年に)亡くなった養父のお墓参りとオモニに逢うため、年に二度くらいずつ大邱の「家」に帰ります。私には韓国と日本の二つの祖国があります。広畑一人こと、李在建には、生んでくれた日本のオモニと、一番苦しい時に見守ってくれた韓国のオモニ、二人のオモニがいます。日本のオモニは亡くなりましたので、これからは韓国のオモニを大切にしていこうと思います」、と淡淡賭した口調で話していた。過去につき誰を怨むこともなく、自分に与えられた不遇な運命を、從容として受け止めているのであった。

「垣根に咲いた黄色いれんぎょう、春の山々を包む満開のつつじ、八公山を鮮やかに彩る秋の紅葉、どこまでも抜けるような青空など、オモニの国の風景が忘れられない」、と涙ながらに大邱を思い出していた。そして、京釜線(ソウルと釜山を結ぶ鉄道)の列車の汽笛が聞こえれば、川原に牛を放して琴湖江(大邱市の北側を流れる川)の土手にかけ上がり、遠く南へ走る列車を眺めつつ、帰国を夢見て泣いた日々を振り返っていた。

れんぎょう[連翹] [명사] [식물]개나리. 

つつじ[躑躅] [명사] [식물] 철쭉; 진달래.

いろどる[色取る·彩る] 색칠하다; 채색하다. 화장하다; 얼굴을 단장하다.


1971(昭和46)年の春、福岡に駐在していた私は、広畑の手記の載った同門誌を見開き、それこそびっくり仰天した。なんと話題の人物ご本人が、同じ市内に住んでいるではないか!まさに「灯火もと暗し」である。市内の天神で初対面した彼は、私に対して後輩としての礼を示し、自分の職場まで案内していただいた。稀な寶石鑑定士の資格を取得した彼は、福岡市天神の地下商店街に、こぢんまりした店鋪を構えていた。当時彼を取り巻いている雰囲気は、私にはいとも幸せそうに映ったし、かつ充実したものに感じ取られた。ときたま顔を合わせると彼は、韓国料理を美味しそうに口にし、韓国の軍歌やナツメロを懐かしげに歌った。彼が最も好んで歌ったのは、6。25戦争の真っ最中に流行った『ビネリヌン コモリヨン』(雨降る顧母嶺)だった。「オモニが恋しい時は、我知らずこの歌が口をついて出るんです」、とカラオケのマイクを握り締め、流暢な韓国語で話しながら歌っていた。

オモニの手をはなし きびすを返す時

みみずくも鳴いたよわたしも泣いた

枯れ葉の舞い散る山の背の端を

越えて来たあの夜が懐かしいかな

こぢんまり [부사] 조촐하고 아담한 모양.

きびすをかえす[踵を返す] 발길을 되돌리다.

1974(昭和49)年, 任期を終えて帰国してからは、年賀状などを交わし友情を温めていた。だが、1990(平成2)年 6月10日, 數奇な運命の主人公広畑一人は、いつかお見舞いに立寄った福岡のH病院で、幽冥を異にしたと知らされた。死因の病名は、かって聞かされた胃がんだったという。死後の病床の枕元には、二人のオモニの写真と、韓国の流行歌集が残されていたと伝え聞き、胸の熱くなる思いで彼を偲んだ。

福岡での広畑の葬儀には、第二の古里大邱から義兄弟たちが参列し、オモニの悲しみを霊前に告げた。

「オモニは山寺にこもり、ジぇコンの死を悼み冥福を祈っております」。

『ビネリヌン コモリヨン』。オモニを恋い慕う李在建こと、広畑一人の歌声は、いつまでも玄海灘に響き渡っているであろ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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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머님이 그리워질 때엔
  • 2017-12-18
  • 김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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