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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의 植民地 統治實態 1942年 (昭和17) 

  • 김학도
  • 조회 : 1198
  • 2017.09.03 오전 09:36



1942年 (昭和17) 

이 해 6月 5日부터 2日間에 展開된 미드 웨이 海戰에서 大敗하고나서부터, 日本軍은 그 氣勢가 꺾이기 시작했다. 日本은 不足한 兵力을 補充하려고 韓國에서도 徴兵制를 實施하기로 결정하고, 朝鮮의 青年들을 저들의 총알받이로 動員했다. 한편 國民 總力 朝鮮聯盟 各 支部는 青年들의 日本軍 人隊를 督勵했다. 또 이 聯盟은 不足한 軍需物資를 補充하기 위해, 家庭의 놋쇠 그릇은 勿論 숟가락과 젓가락까지 모두 供出시켰다. 總督府는 朝鮮 青年 特別 錬成令을 公布하고, 17歳부터 21歳까지의 朝鮮 青年을 訓練시켜 召集하여 갔다. 이렇게 하여 韓半島 全體가 兵営처럼 되어갔다.

이 와중에서도 海外 獨立 運動團體인 韓族團體 會議가 워싱턴에서 열렸으며, 中國 國民 政府 國防 最高委員會가 大韓民國 臨時政府 承認案을 議決했다. 李承晩이 [美國의 소리] 短波 放送을 通하여 故國의 同胞를 激励하는 演説 放送은, 祖國의 民衆에게는 어둠 속의 한줄기의 빛이었다. 이 短波放送은 祖國에 李承晩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5月 29日, 저의 悪名높았던 南次郎 總督 대신 陸軍 大将 코이소 쿠니아키(小磯國昭)가 第9代 朝鮮總督으로 就任했다.

韓國人들은 愛國班常會를 通하여 日章旗掲揚, 神社参拝, 宮城遥拝, 日本語常用, 防空防諜,愛國貯金을 強要 당하며, 各種行事에도 動員을 強制 당했다. 總督府는 그 어간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朝鮮語學 會員에 對한 檢擧를 一斉히 시작하여, 李允宰 등 30名의 한글 學者를 檢擧投獄했다. 저들은 一年間 留置場에서 온갖 拷問을 받은 後,「學術團體를 가장한 獨立運動團體」라는 罪名으로 起訴, 収監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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