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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의 植民地 統治實態 1913 年 (大正2)

  • 김학도
  • 조회 : 1156
  • 2017.08.26 오전 08:22



日帝의 植民地 統治實態

1913 年 (大正2)

   日本帝國이 [韓日倂合]의 前哨作業으로서 1909(明治 42)年 9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 2개월에 걸친 湖南一帶 및 그 外郭에 散在한 義兵 建物을 뿌리뽑기 위해 [南韓 大討伐 作戰]을 전개했다. 이 기간 중 日本 軍警에 犧牲된 義兵은 1만 6천여 名, 負傷者는 3만 6천여 名에 달하고 수많은 義兵 根據地가 放火로 消失했다. [南韓 大討伐 作戰] 後, 日本帝國은 더 以上 義兵은 없을 것으로 알았는데] [韓日倂合] 이후에도 義兵의 義擧가 꾸준히 일어나서 日本 帝國의 軍警을 괴롭혔다. 高宗의 密詔를 받은 湖南 義兵長 林炳瓚은 1912년 말에 回文山 기슭에서 獨立義軍部를 組織했다. 그는 1913년 9월에는 上京하여, 日本의 總理大臣에게 國權返還 要求書를 보냈다.

   安昌浩는 美國의 샌 프란시스코에서 興士團을, 朴容萬은 美國 네브래스카州에서 美洲 留學生會를, 李東輝는 滿洲間道에서 抗日團體 韓僑董事会를 組織하여 將來의 國權回復을 企圖했다. 1911년 新民會事件으로 그 모임은 解散의 危機를 맞았지만 많은 會員이 地下에 潛跡하거나 海外에 亡命하고 海外 獨立 基地를 세우는 데 크게 貢獻했다.

   中國 政府는 滿洲로 移住한 韓國人의 土地所有 및 租借를 妨害했고, 滿洲의 奉天(現 瀋陽) 都督은 開放地域 밖에 거주하는 韓國人으로 歸化나 退去를 强要했으니 在滿 僑民들은 二重의 苦難을 겪었다. 이에 대한 韓國人 指導者들이 우이안스키(袁世凱)에 請願하여 東三省 總督에게서 土地 買入權과 賃借權까지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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