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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렙회

廣島縣 高暮 댐을 방문하고서

  • 김학도
  • 조회 : 1463
  • 2017.07.24 오후 07:55




高暮 댐 방문 

 

                                                                                       김  학도 

고모(高暮=こうぼ댐은 일본 히로시마현(廣島縣) 현북(縣北)에 위치한 댐으로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조선인 노동자 2,000여 명을 강제로 끌어다가 시공한 댐이다.

제가 히로시마 공립병원(広島共立病院)에 입원하여 탈홍근치수술(脱肛根治手術)을 받고 19995월에서 8월까지 3개월간 요양 중에 있을 때이다. 원폭피해자회(原爆被害者会)의 회장 마루야(丸屋) 先生으로부터 고모(高暮) 댐을 방문하지 않겠느냐? 원폭피해자회의 회원들이 가는데 함께 가자는 제의를 받고 고모(高暮) 댐을 방문하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마루야 회장님으로부터 고모(高暮) 댐을 방문한 소감을 써주면 좋겠다는 청을 받게 되어서 당시의 감상을 쓴 글이다(그 원문은 이 글 아래에 게재하였다).

그 날은 화창한 여름날 햇빛을 받으며, 가족을 떠나 있는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은 나들이가 되어서 정말 일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날이 되었다. 하지만, 고모(高暮) 댐을 보고나서 마음속에 지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은 일들이 있다. 그 중에 특히 두 가지 놀라운 일과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이다.

놀라운 일 한 가지는 댐의 규모와 공법 그리고 2,000여 명 넘는 조선(朝鮮)으로부터 연행한 강제노동자를 마치 우마(牛馬)처럼 혹사했다는 것이다. 현지에 가기 전에 마을 공회당에서 미리 준비해 둔 당시의 스라이드를 고교교사(高校敎師)였던 후지무라(藤村) 선생의 간단한 개요 설명을 들었다. 그 설명을 들으면서, 단순히 아아, 그런 일도 있었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댐 현장에 서서 볼 때 당시의 공사과정의 모습을 마음으로 상상하면서 견딜 수 없는 분통을 느꼈다. 70m의 높은 댐을 쌓아올릴 때, 높은 조교(吊橋) 위에서 비벼섞은 생 콩크리트를 쏟아 내릴 때 아래서는 조선인노동자(朝鮮人労働者)가 가슴까지 오르는 긴 고무 옷을 입고 한정된 좁은 나무로 만든 테두리(패널) 안에서 무릎 위까지 차는 콘크리트에 묻혀, 발 빼기가 힘 드는데,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생 콘크리트를 나무 막대기로 또는 철봉으로 쑤셔 공기를 빼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생 콘크리트를 내리게 하는 담당자는 멀리 산 쪽에 있으면서 작업현장을 자기 눈으로는 직접 확인은 못하고, 단지 작업주임의 호루라기 소리를 신호로 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소음(騒音) 속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 노동자는 나무 테두리에 몸을 기대 붙이고 그 순간을 피한 것이다. 무릎 위까지 차는 콘크리트에서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조금만 머뭇머뭇하면 작업주임은 사정없이 호루라기를 부는 것이다. 어느 날 생콘크리트가 내리 떨어지는 순간 조금 전까지 확실히 나무 테두리 안에 있던 조선인노동자가 생콘크리트가 떨어지는 순간에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곁에서 본 사람이 어이, 저기에 확실히 한 사람이 있었는데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해도, 그는 능청스럽게 난 몰라 그런 건하고 상관하지 않고 작업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사람이 선 채로 콘크리트 속에 묻힌 사람이 두, 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생략하지만, 어떻게 그런 식으로 밖에 공사(工事)를 할 수 없었던가. 나는 병원에 돌아와 고모(高暮) 댐을 방문하여 듣고 보고 느낀 바를 쓰려고 할 때, [고모(高暮) 댐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은, 몸부림치며 죽어간 저 조선인의 시신이, 그 댐의 콘크리트 안에 화석(化石)처럼 되어 있겠지...] 라고 생각할 때 안타깝고 자꾸 애절(哀切)한 생각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완공한 댐


 

 

 


 

*방문자들 필자는 앞줄 죄로부터 네 번째, 맨 뒷줄 가운데 얼굴이 길죽한 분이 마루야 회장님.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후지무라(藤村) 선생을 비롯하여, 히로시마현북(広島県北)의 현대사를 연구하는 회의 여러분의 역할과 역사적 사실을 가감없이 그대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그 정신이다. 자기 나라의 사람들이 범한 잔인무도(殘忍無道)한 사실을 기록하여 출판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없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용기는 감추려고 하는 것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는 양심(良心)에 근거(根據)한 것이며, 부당하게 억압을 당하여도 말 못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을 대변(代辨)하는 진정한 인권옹호(人權擁護)이며, 역사를 올바로 정리하여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용감한 투사(鬪士)이며, 또 세계의 평화를 추구하는 피-스 메이카(peace-maker)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서 한 가지 의문스러운 일 하나는 다음과 같은 일이다. 일본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하다. 정직하고 질서정연하게 행동을 한다. 언제나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만일, 약간의 실수라도 범하면 금방 미안합니다라든가 죄송합니다라고 말한다. 신세를 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예의를 표하며, 받은 은혜는 반드시 보답할 것을 잊지 않는다.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는 솔직히 말하지만,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후지무라 선생도 현지에 세워 놓은 댐 건설을 기념하는 석탑(石塔)의 비문(碑文) 가운데 朝鮮人労働者에 관하여 한 말도 없다는 것을 지적(指摘)하면서, 유감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하고, 왜 그러한 일에 있어서 인색(吝嗇)한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것이 곧 나에게 있어서도 무척 이해하기 어려웠던 의문이었다. 개인적인 일본인과 단체 혹은 국가차원의 일본인은 어째서 그렇게 다른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으며 의문인 것이다.

나는 아직 아우슈비츠에 가본 적이 없다. 이야기는 많이 들어서 알고 있다.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박사코스를 공부하고 있는 아들에게 독일 안에 아우슈비츠와 같이 유애인을 수용하고 학대한 곳은 없는지 알아보라고 했더니 한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9983, 독일 남부의 도시, 뮤넨의 근교(近郊) 다카우에 있는 유태인 수용소(収容所)를 찾아서 가본 적이 있다. 규모(規模)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도만큼 크지는 않으나, 아우슈비츠에서 행하여진 잔인한 일들이 똑같이 다카우에서도 행하여졌던 것이다.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大虐殺)에 사용되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전시(展示)되어 역사를 돌이켜 볼 수 있도록 해 놓고 있었다

예를 들면, 전기가 흐르도록 한 철망(鐵網), 가스실(), 그리고 실험을 위하여 설치한 장소, 다시 말하면 전기(電氣)를 통하게 하여 변화되는 인체(人體)의 변화, 사람을 저기압(低氣壓)의 상태에 두고, 급격(急激)히 고도상공(高度上空)에 두었을 경우를 想定(高空實驗), 거꾸로 매달아놓고 혈액의 순환과 정신상태를 체크하는 것(飛行実験) 등등의 일들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내가 히로시마 공립병원(共立病院)에 입원하여 처음으로 읽은 책이 생명을 가지고 노는 현대의 의료(生命をもてあそぶ現代医療였다. 그 책에는 과거 일본관동군(日本関東軍)이 구만주(旧満州)에 설립한 731부대(처음에는 관동군방역급수부(関東軍防疫給水部)의 범죄행위를 읽었다. 731부대에서는 수용된 약 3천명의 사람들 중에서 흑인, 몽골인, 조선인, 러시아인 등을 마루따マルタ(実験材料)라고 불렀다.

731부대에서는, 마루따들에게 31 개의 종류에 달하는 인체실험(人体実験)이 행하여진 것이다. 내가 독일 다카우에서 목격한 것을 여기서는 책을 읽으며 그 이상의 잔인한 행위가 일본군에 의하여 행하여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매년 유대인 학살(虐殺)을 뉘우치면서, 일정한 시기에 TV 또는 라디오에서 아우스비츠 수용소 안의 여러 곳과 나치정권 아래에서 행하여진 유태인들의 비참한 광경을 방영(放映)하며, 추도(追悼)하는 의식(儀式)이 엄숙하게 행하여지고 있다.

좀 말이 지나쳤는지 모르겠으나, 이것이 나의 고모(高暮)댐을 방문한 소감이다. 그래서 나는 양국에 있어서 미력이나마 뭔가 가교적(架橋的)인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여러 모로 궁리를 해 보았다. 가령 문화교류, 즉 통역, 서도, 묵화, 꽃꽂이 등등, 원하건대 지나간 사건은 역사로서 명백히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에 발목이 잡히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 가슴을 열고(open mind) 진취적(進取的)인 것을 즐겁게 서로 연구 또는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를 소망하면서 펜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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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暮ダムをれて

 

          春人

 

()                 

 

これは, 広島共立病院入院脱肛根治手術けてから療養中であった一九九九年五月から八月までの月間原爆被害者さんと一緒になって高暮ダムをれたことがありますが, 当時会長であった丸屋先生から高暮ダムを所感でもいていたいとまれまして当時感傷いたです

 

当日うららかな日差けながら家族れてにはこの上無いせっかくのさわやかなよそきで本当一生忘れられない追憶一日でした

 

ところが高暮ダムをまれた記憶っていることがありますそのつのいたわしくわれたつです

 

いたつのダムの規模,また二千人もの朝鮮から連行された強制労働者をまるで牛馬のように酷使させたとのことです現地もって用意して当時のスライドを藤村先生御説明きながらそんなもあったかなあいましたがいざダムの現場っては当時々な様子想像しながらまらぬきをじました。70メートルのいダムをげる吊橋からぜったコンをろす, では朝鮮人労働者までのゴムいて木枠のなかにってまでコンクリートにつかりながらからちてコンをでつつき混入した空気をぬく作業をしていたのです

 

コンをとすりははるかにいて作業現場自分では確認出来ただ作業主任合図にやっていたがそれも騒音ではよくれないのですがなると労働者木枠をすりせるようにしてその瞬間けるのですコンのでの移動はなかなかうようにはきません一寸マゴマゴしていても作業主任容赦なくくのですある日生コンがちて一寸前までかに木枠にいた朝鮮人労働者コンがちる一瞬姿えなくなったんですそばでおいあそこにかに一人いたがえないっても平気そんならんって相手にしないで作業けたとうのですあのようにたったままめられた三人じゃないとのことです

 

しいしますが如何にもそんなにしか工事出来なかったのか病院って高暮ダムをれたこうとする[高暮ダムが存在するあの朝鮮人のもがきのままそのダムのコンクリートのらわれて化石のようにってるだろううとないいでたまりませんでした

 

 

(2)   

 

もうるのは藤村先生をはじめとして広島県北現代史調べる皆様方きと歴史事実をそのまま中人々にらせようとするその精神であります自分人達した残忍無道記録して出版するとうことは大変勇気ければして出来ないだといますまたにその勇気そうとするのをさなければならぬ良心づいて, 不当抑圧てられてもらされているしみのえを代弁する真正人権擁護であり歴史しくえて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勇敢闘士また世界平和めるピースメイカー(peace-maker)心持います

 

さらにつのいとうのはのことです

 

日本大体親切です正直秩序正しく行動します他人迷惑かけないようにをつけますもしかかの失礼があったらすぐみませんとかごめんなさいいます世話になったにはきっと御禮すしまたけた恩返しをれません. このような事柄について私達韓国人にとっては率直いますけど, ぶべき手本とい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ですが藤村先生現地てているダム建設記念する石塔碑文朝鮮人労働者について一言もないと指摘しながらしいとおつしやいましたけど, 何故そんなことにしてけちいのかとうことがにおいて理解いなのです個人的日本人国家次元日本人はどうしてそんなにうのかとうてい理解出来ないのです

 

はまだアウシュビッツにったはありませんがはよくいていますですが一九九八年三月,ドイツ南部都市ミュンヒェンの近郊ダカウにあるユダヤ人収容所ってたことがあります規模はアウシュビッツ収容所ぐらいにはりませんがそこでった残酷じようにダカウでもナチスのユダヤ人大虐殺のいろんなことが展示されていまして歴史ってるようにしていました

 

えば電気した鐵網ガスまた実験設置したすなわち通電による人間変化低気圧状態におき急激高度上空におかれた場合想定高空実験)、りにして血液りと精神状態のチェック飛行実験々のことがしく説明されてありました

 

(3)

 

共立病院入院してめにんだ生命をもてあそぶ現代医療でしたそのにはかって日本関東軍旧満州設立した七三一部隊めは関東軍防疫給水部)犯罪行為みました七三一部隊では収容された約三千名人達黒人モンゴル朝鮮人ロシアなどをマルタ(実験材料)びました

 

部隊では、「マルタたちを三十一種類におよぶ人体実験われたのですがドイツのダカウで目撃したことを此処ではみながら以上残酷行為日本軍ってわれたのをるようになりました

 

ところがドイツでは毎年ユダヤ人虐殺やみなら一定時期にテレビまたラジオでアウシュビッツ収容所中のいろんなとナチス政権下でのユダヤたちの悲惨光景放映追悼する儀式かにわれてます

 

一寸言いすぎたのかもれませんがこれが高暮ダムをれたじですそして両国いて微力ながら架橋的つことがあればとえてましたえば文化交流通翻訳書道水墨 わくは, ての事件歴史として明白にするのも大事なのですがそれにらわれないで私達けてopen mind) 進取的なことをしくおいに工夫またうような雰囲気みながらペンをきます

  「ぴかに焼かれて」に 

          --りー

 

 

 

 

 

 

 







 김학도

2017-07-26 05:52

그시대의 강제 징용된 분들의 처참함이
안타깝네요 -공주-

 김학도

2017-07-26 05:54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는 그러한 비극적인 일이
결코 되풀이 되지 말아야 겠지요

  •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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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廣島縣 高暮 댐을 방문하고서
  • 2017-07-24
  • 김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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