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島縣 高暮 댐을 방문하고서
高暮 댐 방문
김 학도
고모(高暮=こうぼ)댐은 일본 히로시마현(廣島縣) 현북(縣北)에 위치한 댐으로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조선인 노동자 2,000여 명을 강제로 끌어다가 시공한 댐이다.
제가 히로시마 공립병원(広島共立病院)에 입원하여 탈홍근치수술(脱肛根治手術)을 받고 1999년 5월에서 8월까지 3개월간 요양 중에 있을 때이다. 원폭피해자회(原爆被害者会)의 회장 마루야(丸屋) 先生으로부터 ‘고모(高暮) 댐을 방문하지 않겠느냐? 원폭피해자회의 회원들이 가는데 함께 가자’는 제의를 받고 고모(高暮) 댐을 방문하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마루야 회장님으로부터 「고모(高暮) 댐을 방문한 소감을 써주면 좋겠다」는 청을 받게 되어서 당시의 감상을 쓴 글이다(그 원문은 이 글 아래에 게재하였다).
그 날은 화창한 여름날 햇빛을 받으며, 가족을 떠나 있는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은 나들이가 되어서 정말 일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날이 되었다. 하지만, 고모(高暮) 댐을 보고나서 마음속에 지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은 일들이 있다. 그 중에 특히 두 가지 놀라운 일과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이다.
놀라운 일 한 가지는 댐의 규모와 공법 그리고 2,000여 명 넘는 조선(朝鮮)으로부터 연행한 강제노동자를 마치 우마(牛馬)처럼 혹사했다는 것이다. 현지에 가기 전에 마을 공회당에서 미리 준비해 둔 당시의 스라이드를 고교교사(高校敎師)였던 후지무라(藤村) 선생의 간단한 개요 설명을 들었다. 그 설명을 들으면서, 단순히 「아아,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댐 현장에 서서 볼 때 당시의 공사과정의 모습을 마음으로 상상하면서 견딜 수 없는 분통을 느꼈다. 70m의 높은 댐을 쌓아올릴 때, 높은 조교(吊橋) 위에서 비벼섞은 생 콩크리트를 쏟아 내릴 때 아래서는 조선인노동자(朝鮮人労働者)가 가슴까지 오르는 긴 고무 옷을 입고 한정된 좁은 나무로 만든 테두리(패널) 안에서 무릎 위까지 차는 콘크리트에 묻혀, 발 빼기가 힘 드는데,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생 콘크리트를 나무 막대기로 또는 철봉으로 쑤셔 공기를 빼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생 콘크리트를 내리게 하는 담당자는 멀리 산 쪽에 있으면서 작업현장을 자기 눈으로는 직접 확인은 못하고, 단지 작업주임의 호루라기 소리를 신호로 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소음(騒音) 속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 노동자는 나무 테두리에 몸을 기대 붙이고 그 순간을 피한 것이다. 무릎 위까지 차는 콘크리트에서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조금만 머뭇머뭇하면 작업주임은 사정없이 호루라기를 부는 것이다. 어느 날 생콘크리트가 내리 떨어지는 순간 조금 전까지 확실히 나무 테두리 안에 있던 조선인노동자가 생콘크리트가 떨어지는 순간에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곁에서 본 사람이 「어이, 저기에 확실히 한 사람이 있었는데 보이지 않는다」 라고 말해도, 그는 능청스럽게 「난 몰라 그런 건」하고 상관하지 않고 작업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사람이 선 채로 콘크리트 속에 묻힌 사람이 두, 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생략하지만, 어떻게 그런 식으로 밖에 공사(工事)를 할 수 없었던가. 나는 병원에 돌아와 고모(高暮) 댐을 방문하여 듣고 보고 느낀 바를 쓰려고 할 때, [고모(高暮) 댐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은, 몸부림치며 죽어간 저 조선인의 시신이, 그 댐의 콘크리트 안에 화석(化石)처럼 되어 있겠지...] 라고 생각할 때 안타깝고 자꾸 애절(哀切)한 생각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완공한 댐
*방문자들 필자는 앞줄 죄로부터 네 번째, 맨 뒷줄 가운데 얼굴이 길죽한 분이 마루야 회장님.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후지무라(藤村) 선생을 비롯하여, 히로시마현북(広島県北)의 현대사를 연구하는 회의 여러분의 역할과 역사적 사실을 가감없이 그대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그 정신이다. 자기 나라의 사람들이 범한 잔인무도(殘忍無道)한 사실을 기록하여 출판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없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용기는 감추려고 하는 것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는 양심(良心)에 근거(根據)한 것이며, 부당하게 억압을 당하여도 말 못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을 대변(代辨)하는 진정한 인권옹호(人權擁護)이며, 역사를 올바로 정리하여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용감한 투사(鬪士)이며, 또 세계의 평화를 추구하는 피-스 메이카(peace-maker)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서 한 가지 의문스러운 일 하나는 다음과 같은 일이다. 일본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하다. 정직하고 질서정연하게 행동을 한다. 언제나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만일, 약간의 실수라도 범하면 금방 「미안합니다」라든가 「죄송합니다」라고 말한다. 신세를 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예의를 표하며, 받은 은혜는 반드시 보답할 것을 잊지 않는다.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는 솔직히 말하지만,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후지무라 선생도 현지에 세워 놓은 댐 건설을 기념하는 석탑(石塔)의 비문(碑文) 가운데 「朝鮮人労働者에 관하여 한 말도 없다」는 것을 지적(指摘)하면서, 「유감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하고, 「왜 그러한 일에 있어서 인색(吝嗇)한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것이 곧 나에게 있어서도 무척 이해하기 어려웠던 의문이었다. 개인적인 일본인과 단체 혹은 국가차원의 일본인은 어째서 그렇게 다른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으며 의문인 것이다.
나는 아직 아우슈비츠에 가본 적이 없다. 이야기는 많이 들어서 알고 있다.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박사코스를 공부하고 있는 아들에게 독일 안에 아우슈비츠와 같이 유애인을 수용하고 학대한 곳은 없는지 알아보라고 했더니 한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998년 3월, 독일 남부의 도시, 뮤넨의 근교(近郊) 다카우에 있는 유태인 수용소(収容所)를 찾아서 가본 적이 있다. 규모(規模)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도만큼 크지는 않으나, 아우슈비츠에서 행하여진 잔인한 일들이 똑같이 다카우에서도 행하여졌던 것이다.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大虐殺)에 사용되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전시(展示)되어 역사를 돌이켜 볼 수 있도록 해 놓고 있었다.
예를 들면, 전기가 흐르도록 한 철망(鐵網), 가스실(室), 그리고 실험을 위하여 설치한 장소, 다시 말하면 전기(電氣)를 통하게 하여 변화되는 인체(人體)의 변화, 사람을 저기압(低氣壓)의 상태에 두고, 급격(急激)히 고도상공(高度上空)에 두었을 경우를 想定(高空實驗), 거꾸로 매달아놓고 혈액의 순환과 정신상태를 체크하는 것(飛行実験) 등등의 일들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내가 히로시마 공립병원(共立病院)에 입원하여 처음으로 읽은 책이 「생명을 가지고 노는 현대의 의료」(生命をもてあそぶ現代の医療]였다. 그 책에는 과거 일본관동군(日本関東軍)이 구만주(旧満州)에 설립한 731부대(처음에는 관동군방역급수부(関東軍防疫給水部)의 범죄행위를 읽었다. 731부대에서는 수용된 약 3천명의 사람들 중에서 흑인, 몽골인, 조선인, 러시아인 등을 마루따「マルタ」(実験의材料)라고 불렀다.
731부대에서는, 「마루따」들에게 31 개의 종류에 달하는 인체실험(人体実験)이 행하여진 것이다. 내가 독일 다카우에서 목격한 것을 여기서는 책을 읽으며 그 이상의 잔인한 행위가 일본군에 의하여 행하여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매년 유대인 학살(虐殺)을 뉘우치면서, 일정한 시기에 TV 또는 라디오에서 아우스비츠 수용소 안의 여러 곳과 나치정권 아래에서 행하여진 유태인들의 비참한 광경을 방영(放映)하며, 추도(追悼)하는 의식(儀式)이 엄숙하게 행하여지고 있다.
좀 말이 지나쳤는지 모르겠으나, 이것이 나의 고모(高暮)댐을 방문한 소감이다. 그래서 나는 양국에 있어서 미력이나마 뭔가 가교적(架橋的)인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여러 모로 궁리를 해 보았다. 가령 문화교류, 즉 통역, 서도, 묵화, 꽃꽂이 등등, 원하건대 지나간 사건은 역사로서 명백히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에 발목이 잡히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 가슴을 열고(open mind) 진취적(進取的)인 것을 즐겁게 서로 연구 또는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를 소망하면서 펜을 놓는다.
---끝---
高暮ダムを訪れて
ー春人ー
(1)
これは, 私が広島共立病院に入院、脱肛根治手術を受けてから療養中であった、一九九九年五月から八月までの三カ月間の間、情け深い原爆被害者の会の皆さんと一緒になって高暮ダムを訪れたことがありますが, 当時、会長であった丸屋先生から、高暮ダムを見た所感でも書いて貰いたいと頼まれまして、当時の感傷を書いた文です。
当日は、うららかな夏の日差し受けながら、家族を離れて居る私にはこの上無いせっかくのさわやかなよそ行きで、本当に一生忘れられない追憶の一日でした。
ところが、高暮ダムを見て心の中に深く刻まれた記憶に残っていることがあります。その中で特に二つの驚いた事と、疑わしく思われた事が一つです。
驚いた一つの事は、ダムの規模や造り方,また二千人もの朝鮮から連行された強制労働者をまるで牛馬のように酷使させたとのことです。現地に行く前、前もって用意して來た当時のスライドを藤村先生の御説明を聞きながら「そんな事もあったかなあ」と只に思いましたが、いざダムの現場に立っては、当時の様々な様子を心で想像しながら止まらぬ驚きを感じました。70メートルの高いダムを造り上げる時、高い吊橋の上から混ぜった生コンを降ろす時, 下では朝鮮人労働者が胸までの長ゴム服を履いて木枠のなかに入って、膝の上までコンクリートにつかりながら、上から落ちて來る生コンを棒でつつき、混入した空気をぬく作業をしていたのです。
生コンを落とす係りは、はるか山の方にいて作業現場を自分の目では確認出来ず、ただ作業主任の笛を合図にやっていたが、それも騒音の中ではよく聞き取れないのです。笛がなると、労働者は木枠に体をすり寄せるようにして、その瞬間を避けるのです。生コンの中での体の移動はなかなか思うようには動きません。一寸マゴマゴしていても作業主任は容赦なく笛を吹くのです。ある日生コンが落ちて来る一寸前まで確かに木枠の中にいた朝鮮人労働者が,生コンが落ちる一瞬に姿が見えなくなったんです。そばで「おい、あそこに確かに人が一人いたが見えない」と、言っても、彼は平気に「そんな事は知らん」と言って相手にしないで作業を続けたと言うのです。あのようにたったまま生き埋められた人が、二、三人じゃないとのことです。
詳しい事は略しますが、如何にもそんな風にしか工事が出来なかったのか、私は病院に戻って高暮ダムを訪れた事を書こうとする時、[高暮ダムが此の世に存在する間は、あの朝鮮人の死のもがきのまま、そのダムのコンクリートの内に捕らわれて化石のように成ってるだろう]と思うと切ない思いでたまりませんでした。
(2)
もう一つ驚き入るのは、藤村先生をはじめとして、広島県北の、現代史を調べる会の皆様方の働きと歴史の事実をそのまま世の中人々に知らせようとする、その精神であります。自分の国の人達が犯した残忍無道な事を記録して出版すると言うことは、大変な勇気が無ければ決して出来ない事だと思います。また、実にその勇気は隠そうとするのを示さなければならぬ良心に基づいて, 不当な抑圧を当てられても黙らされている苦しみの訴えを代弁する真正な人権擁護であり、歴史を正しく整えて置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勇敢な闘士、また世界の平和を求めるピースメイカー(peace-maker)の心持と思います。
さらに一つの疑いと言うのは次のことです。
日本の人は大体に親切です。正直で、秩序正しく行動します。他人に迷惑かけないように気をつけます。もしか僅かの失礼があったらすぐ「済みません」とか「ごめんなさい」と言います。お世話になった人にはきっと御禮を表すし、また受けた恩は必ず恩返しを忘れません. このような事柄について私達韓国人にとっては率直に言いますけど, 学ぶべき手本とい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ですが藤村先生も、現地に建てているダム建設を記念する石塔の碑文の中に「朝鮮人労働者について一言もないと」指摘しながら「悔しい事だ」とおつしやいましたけど, 何故そんなことに対してけち臭いのかと言うことが、私において理解し難い疑いなのです。個人的の日本人と国家次元の日本人はどうしてそんなに違うのか、とうてい理解出来ないのです。
私はまだアウシュビッツに行った事はありませんが、話はよく聞いています。ですが一九九八年の三月,ドイツ南部の都市、ミュンヒェンの近郊ダカウにある、ユダヤ人収容所に行って見たことがあります。規模はアウシュビッツ収容所ぐらいには足りませんが、そこで行った残酷な事が同じように、ダカウでもナチスのユダヤ人大虐殺のいろんなことが展示されていまして歴史を振り返って見るようにしていました。
例えば電気を流した鐵網、ガス室、また実験の為に設置した所、すなわち通電による人間の体の変化、人を低気圧の状態におき、急激に高度上空におかれた場合を想定(高空実験)、逆さ吊りにして血液の巡りと精神状態のチェック(飛行実験)等々のことが詳しく説明されてありました。
(3)
私が共立病院へ入院して初めに讀んだ本が「生命をもてあそぶ現代の医療]でした。その中には、かって日本関東軍が旧満州に設立した七三一部隊(初めは関東軍防疫給水部)の犯罪行為を讀みました。七三一部隊では収容された約三千名の人達の中で黒人、モンゴル人、朝鮮人、ロシア人などを「マルタ」(実験の材料)と呼びました。
部隊では、「マルタ」たちを三十一ヶ種類におよぶ人体実験が行われたのです。私がドイツのダカウで目撃したことを此処では本を讀みながら其れ以上の残酷な行為が日本軍に依って行われたのを知るようになりました。
ところが、ドイツでは、毎年ユダヤ人虐殺を悔やみなら、一定の時期にテレビまたラジオでアウシュビッツ収容所中のいろんな所とナチス政権下でのユダヤ人たちの悲惨な光景を放映し、追悼する儀式が厳かに行われて居ます。
一寸言いすぎたのかも知れませんが、これが私の高暮ダムを訪れた感じです。そして私は両国に於いて微力ながら何か架橋的な役に立つことがあればと色々考えて見ました。例えば文化交流、即ち通翻訳,書道、水墨、生け花 等々。願わくは, 曽ての事件は歴史として明白にするのも大事なのですが、それに捕らわれないで、私達は胸を開けて(open mind) 進取的なことを楽しくお互いに工夫、また話し合うような雰囲気を望みながらペンを置きます。
「ぴかに焼かれて」に
--終りー
김학도
2017-07-26 05:52
그시대의 강제 징용된 분들의 처참함이
안타깝네요 -공주-
김학도
2017-07-26 05:54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는 그러한 비극적인 일이
결코 되풀이 되지 말아야 겠지요